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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Jul 21. 2023

너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거야

사랑이 뭔데

- 너, 나를 너무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고 있어.
- 뭐가
- 난 말이야, 일단 기본적으로,
   여자가 있는 남자는 안 좋아하거든.

믿지 않고 있었다.

- 내가 Y와 잘 지낼 수 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여친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안전한 거야.
- 됐어, 안 믿어.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
쌀로 밥을 한다 해도 안 믿을 표정.

- Y는 여자친구가 있잖아. 난 그 둘 사이를 네버!
   방해할 생각이 없다니까!

심지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나는 억울했다.
Y와 M 그리고 나의 하트 카푸치노

내 스타일도 아니고 이성으로 설렌 적도 없는데

Y가 매일 내 이야기를 한다며 너도 좋아하냐는

뉘앙스의 대화를 난데없이 시작한 이 아이는 바로

Y의 룸메이트이자 7살 어린 일본 남자애 M이었다.


M은 나보다 키가 훨씬 컸지만 내 눈에는 그냥 애 같

초반에는 대놓고 애 취급을 했다.


-  왜 Y한테는 영어 쓰고 나한테는 러시아말 써?


말에 덜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했달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영어로 말할 때에만 상냥하다.


친동생이 나와 영국인의 대화를 듣고 일종의
충격을 받아 엄마께 "누나 영어 할 때 봤어?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던
후일담을 듣고 큰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 반대로
영국친구들은 나랑 영어로만 대화해오다 그날
한국말 하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을 듯. ㅋㅋㅋ
러시아어로 말할 때에는 더욱 상냥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하아....) 또한 노어에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가 확연히 있으니, M을 대할 때
필시 어린아이 대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같은 일본인인데 Y에게는 영어로 상냥히,

M에게는 어로 여장부처럼 대하자 차별하느냐

물은 것. 그때터 M과도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살면서 심지어 외국인 사이에 "위아래"를

결코 논한 적 없으나, Y도 M도 남자라기보다는 친구,

한편 정말 "아이들" 같았다. 우리 셋은 곧잘 하하호호

웃으며 쿵작도 잘 맞아 흡사 유치원생들처럼 지냈다.


나는 그런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순수한 관계.


문구용 가위로 머리를 싹둑 자르고 업로드하면,

자기들도 곧 기숙사에 돌아온다며 자른 것 보자는

메시지가 오고, 복도에서 내 단발을 보여주자

"오오~ 잘 잘랐다" 엄지 척 하하하 호호호 그렇게

그냥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이 좋았다.

어쩌면 학창 시절의 마지막 우정이 될 것 같아

이 시간을 더 소중히 내고 싶었다.

상당히 길어서 러시아 뉴스 카메라에도 다 담기지 못하는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 기숙사. 내 아지트는 좌측 맨 끝 창가였다.

그런데 그날 밤 기숙사 복도 끝 창가에 걸터앉아

(옆방 중국 유학생들의 술파티 소음으로 자주 피난)

노트북으로 악보를 입력하던 나를 보고 다가온 M이,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씩 흩어져 방으로 돌아가는데

가지 않고 차가운 복도 바닥에 쭈그려 앉는 것이었다.


- 올라가야지.

- ...

- 이제 올라가야지~ 내일 실기시험이라며~

- 괜찮아.

- 연습했어?

- 내일 하면 돼.

- 그래도 일찍 자야 하지 않을까

- 괜찮아 상관없어. 나 원래 늦게 자.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여 노트북을 접고

맞은편 벽에 기대어 섰다. 좀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진지해 보이기도 하고. 그날따라 너무 조용했다. 

복도는 아주 길었고, 가끔 지나 계단을 올라가는

기숙생 말고는 우리뿐이었다.


Y가 맨날 네 얘기해.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 응?

- Y가 맨날 네 얘기만 한다고.

- ...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알면서도 모르듯 미묘했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아보니,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 주제가 맞았다. 그런 주제를 이 아이가 나에게

이리 대놓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꿈에도 몰랐다.


평소처럼 장난치듯 철없듯 말하면 웃어 넘기기라도

텐데 하필 또 그렇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진지해서 내심, 당혹스러웠달까.

Y의 룸메인 만큼, 아무래도 Y와 내 관계, 

그에 대한  의사를 똑바로 말해줄 필요를 느꼈다.


Y는 여자친구가 있잖아.


- 그게 무슨 상관이야.

- 아니, 여자친구가 있는데 Y가 내 얘기 한 거야말로

   무슨 상관인데.

- Y가 너를 좋아한다고.

- Y는 나를 친구로 좋아하는 거겠지.

   그리고 여친이 있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여친이 일본에 있잖아.

- 아니 일본에 있건 어디에 있던 여친 있는 거잖아.

- 나도 여친 있었는데 여기 올 때 헤어졌어.

   이 패딩도 전여친이 사준거야...

- 왜 헤어졌는데?

- 여기 오니까. 걔가 나 좋대서 사귀었는데 어차피 

   진지하지도 않았고. 이 패딩처럼 고장난 거지.

- 야 그 패딩 지퍼 좀 진짜 어떻게 고쳐봐.

   영하 20도에도 지퍼를 열고 다니냐.

- 고장났어. 버려야되. 전여친처럼 패딩도 끝난 거.

- 고쳐입어.

- 싫어.

- .. 아무튼 Y가 맨날 방에서 니 얘기만 한다.

   어제도 그렇고..

-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진짜 아니야.


웃기시네 하는 표정이었다.


- 나한테 Y는 좋은 친구야. 진짜야.

 Y 성품 좋잖아. 좋은 사람이라서 잘 지내는 거야.

 진짜 친구라고, 나한테.


미동도 없는 표정이라니.


- 정말이라니까. 그리고 그게 누구든, 설사 만일,

  아주 만일, 호감을 느꼈다 해도 여친 있으면 절대

  아무것도 안 해. 그런 거 제일 싫다고.

- 아니야

- 맞거든

- 아니야

- 맞아

- No

- 진짜라니까!!!


진짜 아닌데. 설명의 한계인가.

나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친절하게 아니라고 하니 못 알아듣는 이 녀석에게

본떼를 보여주지 하는 느낌으로 전투를 시작하듯.

대체 내가 이 밤에, 이 복도에서, 축 늘어진 듯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이 남자애에게

 설명까지 해가며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닌 건 아니니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애가 오리를 만들 때마다 나는 왕관을 씌워주었다

평소 자주 이렇게 날 맹수(?)로 훈련시키고,

그런 나에게 등짝을 얻어맞으며 '어그레시브'하다고

외치던 이 아이. 하지만 분위기 자체가 이상하게

진중해서 계속 1.5미터 간격을 유지 중이었다.


부가설명이 무척 필요해 보였다.


- 심지어, 만일 어떤 남자애랑 서로 좋아한다 쳐.

그런데 중간에 다른 여자가 그 애를 좋아하면,

설령 그 남자애는 그 여자 싫고 계속 날 좋아한대도

그 상황에서조차 내가 비키려는 타입이야.

중간에 끼는 거 제일 싫어한다니까! 질색이라고. 

여태까지 아무도 남자로 사귄 적도 없어, 아예.

다 친구라고.(실화라서 호소할 수 있었.....)


드디어 나를 딱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그전까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럼 넌 Y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어이가 없었다. 사랑이라니, 맙소사. 당연히 아니지.

네 녀석이 이제야 알아들었구나 싶어 반갑게 답했다.


- 그래, 그렇다고. 나는 정말 Y가 좋은 인품을 지닌

  사람이고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해.


- 그리고 넌 한 번도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거야.


- 뭐라구?


- 너는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너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


실소했다.


- 내가 ^^?

- 어

- 내가 ^^^???

- 어

- 내가 사랑을 한 적이 없다고? 아하하하하하하

- 그래, 네가.


나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웃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황해서 웃고 어이없어서 웃고 웃겨서 웃었다.


네가 뭘 안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 7년 더 살았는데. 

그동안 살면서 남자 한 번 사랑해 본 적이 없겠냐. 

비록 사귄 적 없지만 마음으로는 사랑한 적 있겠,

설마 내가 사랑을 한 번 안 해봤겠냐. 

얘 너무 웃기네  아무것도 모르네 딱 이런 심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같은

감성 오버플로잉 투 센티멘털 존재에게 

사랑해본 적 없다는 발언을 하다니 당치 않다.

이렇게 나온다면 반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 내가 살면서 사랑을 한 번 안 해봤겠냐.

- 사귄 적도 없다며

- 그거랑 다르지. 그렇다고 사랑을 안 해봤다는 건,

   하하하 그건 좀 네가 너무 어려서 모르고 있..

- 넌 사랑을 한 적이 없는 거야

- 아니거든..

- 없어

- 거든

- 없어

- 아 진짜! 있다고..!


- 정말 사랑하면, 연인이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어

- 상관있어

- 상관이 없어..

- 아니야

- 맞아

- 아니야


- 애인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거야.

  정말 좋아하면 그런 거 아예 상관이 없다고.

  나도 아직 사랑을 해본 적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


바닥에서 일어나던 그 애에게 내가 답했다.


하지만 사랑이 소유하는 것은 아니잖아?


고개를 끄덕이며


- 그건 그렇지..


내가 이기는 건가 하는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그렇더래도 너는 사랑을 한 적이 없다.


와.....


- 너, 네가 일본인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

- 왜??

- 내가.. 말발이 장난 아니거든.

- 어, 근데 너 좀 그런 것 같긴 해.

   언어 아직 배우는 중인데도 평소 너보다 웃기고

  기발한 애 못 본 것 같긴 해.

- 우리 아빠 닮았어. 아빠가 일본에서 아나운서인데

  화술에 타고났거든.

- 아.. 어쩐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루저의 기분으로 방에 들어갔고...



이튿날 아침 이불 정리 도중 환청이 들려왔다.


"넌 아직 한 번도 사랑을 한 적이 없어"


에이 무슨ㅋ


"넌 사랑을 한 적이 없어"


에이 설마ㅎ


"한 번도 없다"


진짜인가...!!!!!


완전히 낚였다.


오전, 마침 강의 하나를 마치자,

어젯밤 내게 "헛소리"를 했던 M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 애의 소리가 무척 궁금해졌다.

혹시나 하여 잠시 들러본 4층 홀. 놀랍게도 마침

그 시각, 그 아이의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그저 Y의 룸메이트이자 재미있는

어린 남자애, 일본 대기업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우리 학교 가장 유명한 교수님의 제자로 왔다던데,

줄곧 한 손에 술병을 들고 기숙사 복도를 활보하던

조금 한심해 보이고, 철없지만 순수한, 방학 때 집에

다녀오더니 별사탕을 주던 귀여운 남자애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울고 있었다.

그전까지 분명 아무렇지도 않던 내 눈에서

정말 이상하게도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려왔다.


소리 없이, 하염없이 울었다.


그 아이의 연주가 내 가슴을 뒤흔들고 있었고

어느 것보다 가까운 소리를 홀에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놀란 것일까

혼(soul)까지 충격을 받은 것이었을까.

혹은 음악과 혼, 둘 다 알아버린 동질감이었을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긴 복도의 끝 창가에 걸터앉은 채 작곡하던 나를

지나가다 발견할 때면 앉으라고 하지 않아도 옆에 와

무심코 걸터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날엔가는 누구에게도 잘하지 않던 나의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노라면, 가만히 들어주던

이 아이 옆에서 유일하게 울 수 있었던 까닭은,


들켰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비겁함을.


나는 그 비겁함으로 그 아이를 화나게 만들었다.

늘 그렇듯 소울메이트 같은

이성친구와의 영원한 우정은

나 같은 이상주의자에게나 통하는 꿈이었다.


처음 예상대로, 혹은 계획대로 Y와 M은 나에게

유학 마지막 우정의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반지왕관을 쓴 물수건 오리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다.

사랑을 해 본 적 있는지

점점 모를 일이다.


이제는 심지어

확신했던 것들 조차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를 그토록 좋아해 주었던 상대가 했던 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얻지 못해 커진 승부욕이었을까

그에 대한 True or False의 의미조차 무색하고

이제 나에게는 어쩌면 오직

신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유효하게 남아있다.


사랑

사랑을 100명에게 물으면 100가지 답이 나오나,

나에게 사랑이 무언지 물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랑은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온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생각한다.

참다가도 못 참을 때가 있고 친절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말할 때에는 마치

"오래 참겠습니다. 친절하겠습니다.." 등의

다짐을 하는 것과도 같았다. 가족에게 사랑한다

말할 때에도 감정으로만 하지 않았다. 

노력하겠다는 다짐 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을 왜 서약이라 할까.

다짐과 약속이 들어있어서일 것이다.

다짐과 약속 없이는, 꾸준한 노력과 희생 없이는

그 누구도 평탄한 결혼생활을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에 감정이 없을 리 없지만

감정만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감정은 사랑의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


감정이 식으면 사랑이 식었다며 헤어지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각자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진정한 사랑은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그것이다. 

그는 나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변함없이

해내고 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예수의 답이 이러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어떤 형태로든 어떤 대상에게이든 사랑은

진행되고 노력하며 완성해 나가는, 

나에게는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한 적이 없을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거나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나만을 위해서 했던 비겁한 행동들은

한편 배려 또는 좋은 뜻으로 포장된

이상주의자의 위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사명과도 같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을 오롯이 진정으로 사랑한 적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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