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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Jun 18. 2023

어떤 전화 한통

전화할까, 말까. 갈등한 지 어연 십분. 10년 보험회사 짬밥에 고객하고 전화야 진물날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과의 전화는 항상 어렵다. 특히 거의 전화할일이 없는 나에게 부탁하는 전화는 난이도 극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엄팀장의 간절한 눈빛이 아니었다면 바로 거절했을 텐데 제길. 나는 엄팀장이 준 서류와 그 위의 포스트잇을 다시 흘끔 봤다.


이거만 잘 해결하면 30만 원짜리 위스키 한 병 사줄게.


긴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객의 병명과 증상을 살폈다. 진단코드는 '자궁경부 이형성증(N87.2)', 자궁경부상피에 암 전 단계인 비정형세포들이 존재하는 질병이었다. 이 세포는 점점 크기가 증가하여 암으로 확장되는데, 보통은 건강검진이나 정기검사에서 자주 발견되어 암으로 발전되기 전에 수술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자궁경부 이형성증도 비정형세포 침윤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데, 실제 침윤 정도가 심하면 유사암으로 인정받아 유사암 보험금이 지급되기도 했다. 진단서 상에는 유사암 코드(D)가 아닌 일반 이형성증(N) 코드기 때문에 보험사와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손해사정만 잘 끝나면 유사암진단금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고객도 그랬다. 조직 검사지 상에 세포 침윤이 높아 다시 의사를 찾아가 이야기만 잘하면 D코드로 진단서를 내어줄 만했다. 뭐, 안돼도 다른 방법을 좀 쓰면 되겠지. 고객의 유사암 가입금액은 현대, 롯데, 메리츠 각각 1,000만 원씩. 총 3,000만 원. 유사암진단비는 지급률이 꽤 높은 담보라 많이 가입하기 어려운데 많이 알아본 흔적이 느껴졌다. 음, 이 정도면 분명 받고 싶어할 거 같은데. 왜 굳이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는 거지. '어이구, 팀장님 요즘 좋은 건이 많이 들어와서 돈이 많나 봐. 나 위스키 사주려고 주는 거야?'. '과장님. 고객하고 전화 한번 하면 알 수 있습니다.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는 걸'


"아, 저 암환자 아니라니까요. 제가 너무 멀쩡한데요."


아니, 제 말은 고객님이 암에 걸렸다는 게 아니라요. 이 차트 보면 보험사의 [유사암 진단비]에 해당할 수 있거든요. 말 그대로 [유사암]입니다. 보험사도 이건 암이 아니라 암에 유사하게 근접했다 라고 해서 이런 담보를 만든 거예요. 보험사도 고객님이 암환자로 인정한 건 아니에요. 고객님이 만약에 진짜 암이었으면 1억 넘게 받으셨겠죠. 그리고 요즘은 이런 거 받아도 2~3년만 지나면 고객님이 또 필요한 보험 가입할 수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 건, 3,000만 원 저희가 받게 해 드릴 테니 같이 진행해보시죠. 주치의 한번 다시 만나고 보험금 청구만 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근거 자료, 의사 소견, 자문의견 등 다 준비할 수 있습니다.


첫 전화는 결국 실패했다. 난 암 환자가 아니다. 멀쩡한데 왜 이렇게 불편하게 하냐는 이유로 거절했다. 목소리에는 부당함, 건강함에 대한 자부심, 귀찮음 등이 섞여 있었다. 길게 이야기해봤자 득 될 게 없었다. 에헤, 내 위스키가 이렇게 날아가는 건가?  '이거 안될 거 알고 던진 거?' 엄팀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렇게 고집부리는 사람 꼭 있지요. 그런 걸 해결해주는 게 과장님 능력이지요.


답답함과 고집, 그리고 보험과 엮이니까 생각나는 사례가 하나 더 있었다. 정확히 7년 전 12월 요맘때였다. "고집불통", "자기만 아는 사람" 길여사가 짜증과 노함을 꾹꾹 담으며 치던 멘트였다. 집안의 A부터 Z인 길여사가 짜증 나는 순간은 보통 배우자인 김어르신 때문이었다. 어르신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그날도 그랬다. 10년째 일 안 하고 놈팡이로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어디선가 놀다 쓰러져 남은 세명이 반차를 쓰고 응급실에 온 상황부터 길여사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의사인 동생은 MRI 차트의 뇌혈관이 터진 자리를 보더니 고혈압이 원인이라며 왜 혈압약을 꾸준히 먹지 않았냐고, 나이 먹으면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며 어르신을 추궁했다. 실제 어르신은 본인의 몸을 과신하며 몇 달 동안 고혈압 약을 먹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첫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어르신은 갑자기 둘째 날부터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둘째 날은 멀쩡히 걷다 머리를 부딪혔다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하더니, 셋째 날에는 멀쩡히 걷다 누군가 세게 민 문 끄트머리를 맞고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했다. 정말 멀쩡히 걸었는데 억울하다, 나는 잘못 없다는 말은 덤이었다. 주어와 목적어가 없던 두리뭉실했던 문장이 어느새 어르신의 입에서 시간이 지나자 그럴듯하게 완성되었다.


문제는 보험이었다. 뇌출혈은 질병에 대한 보장이라 상해가 원인이 되는 즉, 맞거나 부딪쳐서 생긴 뇌출혈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보험사 직원이 나와 현장조사를 실시했고 어르신은 꿋꿋이 본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뇌출혈 진단금 500만 원은 그렇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동생은 차트를 보면 고혈압이 원인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며 보험사 직원과 싸웠지만 본인의 주장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억울하면 손해사정사를 고용해서 진행해라 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어르신은 본인 몸은 건강하고 멀쩡한데 무슨 보험금이냐고 이야기했고, 잘 길여사는 고집불통이라며 신경질을 벅벅 냈으며, 동생은 의사 말보다 환자 말을 더 믿는 보험사가 사기꾼이라고 화를 냈고, 나는... 나는 이 대환장파티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뇌출혈은 일시적으로 몸의 마비를 가져오기 때문에 통상 병간호가 필요했다. 후보자는 길여사, 나, 동생, 총 세명. 레지던트인 동생은 당직이 많다는 이유로 애초에 제외되었다. 뭐.. 의학 드라마에서 레지던트의 삶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현실은 로맨스가 없으니 그거보다 더하면 더했지 낫지 않은 삶이었다. 결국 길여사와 나, 둘이서 병간호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길여사는 이미 딥빡쳐있는 상황. "그래도 네가 아들이니까 저녁마다 다 있어." 평소에 얘기도 안 하는 나랑 어르신이 한마디도 안 하는걸 뻔히 알면서. 길여사는 어르신에게 화가 나서 성에 안 풀리면 나에게 아들이라는 이유로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12월 21일부터 26일까지 찍소리도 못하고 강남세브란스병원 2인실에서 밤에 병간호를 했다.


으으


연말에 불 꺼진 병실과 적막한 공기 , 그리고 아세톤 냄새는 정상인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밤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마저 소름 돋았다. 나는 항상 한쪽에는 이어폰을 꼽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으으으


어르신이 날 찾는 소리였다. 사실 으으때부터 찾고 있었다. 병간호를 몇일 하다보니 신음소리만 듣고도 어르신의 말하고자 함을 알게되었다. 대충 으으 정도면 버틸만 한거고 으으으, 으으으으 까지 가면서 소리가 조금 높아지면 급한 상태였다. 본인의 몸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듯, 그는 화장실이 가고 싶다, 잠깐 돌아다니고 싶다 라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뭔가 필요하면 으으, 으으으로 나를 찾았다. 환자의 생활습관에 맞춰 부축해서 화장실 볼일을 봐주고, 중간에 운동시키고 출근하는 일은 고난했다. 특히 대변은.. 와우.. 피로와 짜증이 종종 몰려왔다.


응급실 비용, 입원비용 다 합치면 오백이 넘어요. 보험사와 다시 이야기해보시죠. 오백만 원 어디 땅 판다고 안 나옵니다.


그는 입원해있는 동안 가족과 대화를 일절 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차트를 보며 따박따박 따지는 동생, 한바탕 짜증과 화를 내고 사라진 길여사, 의무감에 영혼 없이 병상 옆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는 아들, 무엇하나 만족할만한 게 없었겠지. 그렇게 일주일 동안 나는 최소한의 의무를 하면서, 어르신도 최소한의 생리현상 외에 부탁하는 일 없이 서로 사적인 대화를 하나도 안하고 일주일간의 불편한 동거를 마쳤다. 그리고 한 달 후 내 통장에는 500만원의 금액과 함께 어르신의 문자가 왔다.


그냥 그때는 늙는 게 무서웠다. 엄마한테 돈 보내고 미안하다고 전해라. 나 돈 많다.


몸이 제일 아팠던 당신은 위로받긴 커녕 마음조차도 제일 아플 수밖에 없던 기간이었다. 우리는 타인을 솔직하게 이해하고 터놓고 말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나. 가장 가까운 가족까지도 이런데. 누구의 마음에나 용량은 정해져 있고 각각의 나름대로의 장벽이 있다. 마음의 장벽이 높을 뿐인데 그것을 누군가는 고집 있다는 표현으로 말하곤 한다. 나는 얼마나 솔직함을 드러내며 타인을 설득해봤을까. 고객과 통화한 후 7년 전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넓은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업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쉬웠다.


'내가 고객 설득하면 위스키 한병 더. 콜?'


몇 분 후 엄팀장에게 답이 온다.


'내가 언제 섭섭하게 대접한 적 있나?'


밖이 더 깜깜해지기 전에, 내 마음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전화기를 들었다.


"고객님, 왜 또 전화했냐구요?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를 좀 해드리려구요. 일단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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