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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오늘 Feb 04. 2022

22화) 바로 따서 먹는 삶, 자연 냉장고

[옥상의 자연인이 사는 법 : 도전! 식량기르기]

이 글은, 완벽한 자연문맹이었던 도시인 '나자립 씨'가 옥상에서 식물(식량)을 길러 자급한 1년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생명체가 살지 않았던 녹색 방수페인트 행성이 80여 종이 넘는 식물과 다양한 생태계가 이루어진 옥상 낙원으로 변신한 놀라운 천지창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워온 스티로폼 박스에 토종작물을 심고 생태 순환농사로 길렀습니다. 직접 모든 씨앗을 받고 나누었습니다. 그 좌충우돌 재밌는 경험을 나누려 합니다 :)



11~12째 주 (4.18~5.1)


바로 따서 먹는 삶, 자연 냉장고

아직 꼬맹이들만 있는 옥상에 장성한 돌나물이 입소한 덕분에, 바로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생겼다! 기쁨~ 


비빔면에 투하. 싱싱싱! 이것이 돌나물의 진짜 맛이로구나. 돌나물은 한강 둔치에도 가득 있다. 쑥만큼이나 강인하게 잘 자라는 돌나물. 이제 돌나물을 사러 마트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건강하게 계속 잘 자라다오~ 행복하다.

그러다가, 무싹이 새끼손가락만큼은 자라서 몇 개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당근의 싹들도 큰 것 두어 개를 따고. 역사적인 날! 

힝. 예쁜 무잎과 쑥 잎. 각기 가진 이 고유의 아름다운 모양들!


아직 작지만, 나름대로 잎들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심조심 가장 큰 잎들만 골라서 (식물들에게 무리 가지 않게) 1~2개 잎씩만 가위로 잘 잘랐다. 


맨발의 나는, 옥상의 자연인.

비타민이가 효자.


새싹 씨앗용이었던 그 많던 씨앗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모두 다 길러내고 있는 덕분에 점점 잎들이 무성하게 커가면서 많은 잎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아직도 작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엄지만 한 잎까지 만들어졌다! 귀엽고 아담하고 맛있는 비타민이!

마늘잎도 큰 잎들로만 수확!


즉석에서 잘라 바로바로 먹을 수 있는 삶이란! 수확해둔 다음 메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먹을 것을 생각하고 그 필요에 따라 딱 그만큼만 자연 냉장고에서 따오는 것이다. 이보다 싱싱할 수가 없으며, 낭비나 저장, 그를 위한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도 없다.


그리고 내 신비의 자연 냉장고에서는 계속해서 매 순간 식량들이 자라나고 있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살아있는 진정한 풍요로움'이다.

노르노릇! 쑥전이 금세 완성!


고마워. 잘 먹을게! 햇빛과 바람과 곤충과 흙, 쑥에게 모두 감사하며. 이 귀하고 맛있는 보약을 먹는다. 


언제든 뜯어먹을 수 있는 쑥이 옥상에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난 이제 어떤 일이 생겨도 굶어 죽진 않게 된 것이다! 야호.

콩나물이를 수확했던 용기에, 새롭게 뿌려두었던 비타민 씨앗들. 꼬물꼬물 싹들이 부지런히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이렇게 신비한 식물의 세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알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 '이 안에서 우주의 원리와 비밀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날, 금세 보글보글 싹이 돋아나고 있다. 그런데 노란 머리잖아! 한참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콩나물 키울 때 뚜껑을 덮어놓았던 것이 익숙해져서 글쎄 비타민으로 교체한 후에도 생각을 못 하고 계속 뚜껑을 덮어놓고 있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났다.


아! 이건 뿌리 키우는 것이 아니라, 녹색의 싹을 틔우려는 것이었지? 해를 듬뿍 받게 하여 광합성을 시켜야 하는 것인데 그만 가려버려서 아직 흙 속에 있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잎들이 노랗다.


지금부터라도 어서 해를 보게 해 주어 푸르른 어린이들로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식물의 개념을 알고, 내가 하는 것들이 무엇을 위한 행동들인지 과정과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되니까 좋다. 바로 뚜껑을 벗겼다.




양배추에 꽃이 났어!

생명의 신비란! 매 순간이 감탄이고 놀람, 새로운 관문을 만나는 나날들이다.


농사일(?)을 마치고 밥을 먹으려 양배추를 들었는데, 흐어! 이게 뭐야. 잘린 단면에서 글쎄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뿌리가 잘려서 보관된 지 꽤나 되었는데, 그 안에서도 어떡해서든 생명은 쉬지 않고 작동하여 자신의 생의 의무를 끝까지 다하려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정! 열정! 열정!" 영남 회장의 구호가 BGM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배추 꽃이 열정으로 피어나 있다.

흐으.. 이것을 보고 감히 또 버려버릴 수가 없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절박함에 하늘과 땅과 나(천지인, 3 존재)가 감동하여 이 생명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한다. 이 상태로도 꽃을 잘 피워낼 수 있을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잘 보존하여 잘라 흙에 묻어주어 보기로 한다.


아. 이로써 난데없이 또 양배추 먹으려다가 식구가 하나 늘어났구나! 이렇게 식물 보육원의 규모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증식되어가고 있다. 


결국 심어진 양배추. 어떻게든 잘 살아남아 씨를 이 땅에 남기고 생을 마치길 기원해 본다!

이번엔, '목화학교'에서 받아버린 목화씨와 먹으려고 사온 완두를 또 추가 입소시킨다. 목화는 비누로 닦아서 물을 잘 흡수하도록 기름기를 녹여주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보았다. 인위적인 처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선은 씨가 귀하고 꼭 싹을 틔워야 하니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올해는 그대로 해보기로 한다.

완두 콩이들과 함께 물에 불리기! 2일 정도 담가 두고, 그 후엔 물 자작한 면포 위로 옮겨 올려두고 싹 나오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발아를 위한 임시 인큐베이터라 볼 수 있는데, 물을 자작하게만 만들어 씨앗이 썩지 않으면서 수분은 계속 머금을 수 있게 적당히 맞춰주어야 한다. 


식물들을 가만히 느껴보면, 자신과 잘 맞는 느낌의 종들이 있다. 고유의 성질일 테다. 그리고 분명 영양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영양소나 에너지, 효력 등은 분명 내 몸이 꼭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채워주거나 궁합이 잘 맞는 성질일 거라 감히 예측한다.


몸의 직감과 무의식은 인식보다 빠르다. 설명할 수 없는 오감과 파장으로 이미 식물을 대할 때 알아서 판단한다. 그날그날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에 맞게 먹고 싶은 채소가 달라지는 것이 그 예다. 완두와 목화, 들깨, 마늘은 특히나 내가 느낌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존재들인데 내 몸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나 보다.


그래서 이 완두와 목화는 씨앗을 보기만 해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잘 자라나라 얘들아~




식물 보육원 재정비

어느새 송송 많이 자라 안테나를 뻗은 카모마일들!


빛이 적어지는 밤이 되면 위로 안테나를 최대한 오므려 솟구치는 분수를 만든다. 그리고 낮이 되면 최대한 넓고 낮게 바닥 가까이로 뻗어 표면적을 넓힌다. 식물들은 살아있다!

무럭무럭 잘 크는 깻잎 3형제와 임시 거주민 비타민이들. 이제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청경채 씨앗들도 작은 나비 모양으로 하나 둘 깨어나고.

엇! 그런데 물이 흙 속에서 뭉쳐 빠져나가지 못했는지, 파 하나가 하단이 썩으면서 쓰러졌다. 흐어. 파들 화분을 조만간 옮기면서 흙 상태를 알맞게 보완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발아를 기다리던 씨앗들도 오늘 모두 재점검하여 처리하기로 하였다. 기다린 지 꽤 오래되었고 아무래도 땅도 부족하기에, 아직까지 발아가 되지 못한 씨앗들은 중간 점검으로 탈락시키고 없애야 하는 것이다. 


먹고 나서 남겨두었던 대봉감, 앞집 감, 대추(이것들은 나무다!)의 씨들은 '다행히' 하나도 발아가 되지 않았다. 하하. 싹이 되었어도 큰일이었는데, 잘됐다 싶다. 나중에 진짜 땅이 생기면 그때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하고.

가장 큰 씨앗들이었던 토종 검은땅콩. 열어 까 보니, 싹이 나오려는 것인지 썩은 것인지 사이의 아슬아슬 위험한 상태. 콩과는 그냥 바로 흙에 심었어야 하나보다. 


땅콩의 밭을 마련하여 살아남은 아슬한 2알을 빨리 흙에 심어주었다. 과연 싹이 제대로 나오려나?

으억억. 이게 뭐야! 서리태 콩은 전멸이다. 물에 불어서 완전히 썩어버리고 말았다. 그 냄새가 어찌나 강하고 지독한지.. 놀랐다.


슬프게도 아까운 토종 서리태 콩 씨앗 5알을 이렇게 전멸시켜버려서, 큰 교훈을 얻고 (콩과는 그냥 바로 심자!) 비상용으로 남겨두었던 씨앗을 다시 꺼내었다. 이번에는 2알만. 암면배지는 이제 위험하여 못 쓰겠다. 안전하게 수분 면포 위에 추가 입소시켰다. 하루 정도만 두고 조금이라도 싹이 날 기미가 보이면 바로 심어주기로 한다.

새싹이 힘차게 올라오고 있던 토종 북방오이도 드디어! 방을 마련하여 옮겨준다. 저 조그만 씨앗 속에서 뻗어 나온 푸르른 새싹 우주.

오이가 5알이나 되기에, 좁디좁지만 스티로폼 2개에 자리 배치를 해주었다. 


뿌리, 열매채소들 방 하나 만들어주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힘도, 시간도, 돈도. 그래서 방 하나 만들어 입주시키고 나면 그때가 그렇게 시원하고 기쁠 수가 없다. 휴! 

이로써 옥상 오른쪽 라인(뿌리/열매채소 라인)의 밭도 하나 둘 채워져가고 있다. 휴. 오늘도 조금 나아갔다. 


요놈들이 자라나서 과연 얼마만큼 커지는지, 어떤 모습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코딱지만 하게 작은놈들을 바라보며 매 순간 생의 신비를 가만히 느껴보고 놀라는 일뿐이다. 이 옥상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매 순간, 천지창조 때의 하나님 기분과 상황을 고스란히 느껴보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아! 이런 것이었겠구마!" 아마 그도 이렇게 저렇게 좌충우돌하면서, 하지만 온 마음과 사랑으로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프로그램을 세팅해두고, 그 안에 수많은 씨앗들을 가동해놓은 후, 그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얽히고 얽혀 일어나는 이 모든 것들의 다채로운 조화와 모습을 감탄과 놀람으로 매일 같이 바라보면서 말이다. 지금은 잠시 흥미를 잃어 놀러 나갔거나, 또 다른 곳에서 새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녹색 방수페인트 행성의 나농부는 오늘도 천지창조를 해나간다.  


(다음 편에 계속)



* 이 시리즈 전체 보기 : https://brunch.co.kr/magazine/natoda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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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걸음 Daily Project] 소개 & 참여 : https://blog.naver.com/cocolikesun/22263622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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