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021 연말 결산

친구의 sns 피드에 올해 어워드를 같이 쓸 파티원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어워드가 뭔가 싶었는데, 한 해를 돌아보며 인상적이었던 요소들을 주루룩 적어보는 시간이란다. 송년회 겸 집에 놀러온 친구에게 어워드를 쓰는 법을 알려달라며 억지 펜을 쥐어줬더니, 노트를 펴며 말한 그녀의 한 마디가 인상깊었다. 

"이게 지금 봤을땐 그저 한 해를 정리하는 느낌인데 3년, 4년 지나고 내가 쓴 것들을 보면 그 해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알 수 있어서 좋더라고" 

그렇게 결산해본 나의 2021년. 파닥대며 지나오기 바빴던 시간들을 쭉 뒤로 감아보며, 클리셰같이 말하던 '도대체 뭐 했는지 모르겠는데 한 해가 다 갔네' 라는 연말 단골멘트가 쏙 들어갔다. 알차게 잘 보냈다 2021년.

 




올해의 키워드

혼란 속 빛이 보인다. 동굴 밖의 빛.

29살 이래 나는 늘 정답을 찾으며 길이 보이지 않아 혼란스러워하였다. 이제서야 깨달은 점은 정답도 옳은 길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걷는 과정이다. 길의 끝과 시작도 없고 성공도 실패도 없다. 가는 길에 휴게소도 들르고 경치가 좋으면 잠시 차에서 내려 담배도 한대 피고 하는 여유도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걷고픈 길인지, 누군가가 그저 열어둔 길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원심분리기처럼 탈탈 털려나가는 혼돈은 어느정도 멈춰졌다. 이제 어지럼증을 잠시 가라앉히고 길을 걸어야 할 때다. 



올해의 사람

내가 살았던 모든 시간, 최고의 친구는 늘 우리 엄마였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동안 곁에 머물러있는 내 가장 좋은 친구, 사랑하는 만수.



올해의 음악

장제헌 - 가장 밝지만 빛나지 않는 것  

슈베르트 4impromptus, Op 90, D. 899 : No.3 G-flat Major (4개의 즉흥곡 3번 내림 사장조 작품번호 90)

사실 19년, 20년에 이어서 음악을 음악 그대로 고스란히 잘 즐긴줄 모르겠다. 생각 더미에 휩싸여 오롯하게 음악을 즐길 여유를 갖지는 못했다만 그럼에도 들었던 곡들은 폭풍 속 잔잔하게 마음을 위로하거나, 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간결한 연주곡. 그리고 유튜브 프리미엄이 가져다준 몰랐던 취향 ambient music.

https://www.youtube.com/watch?v=RiX-xQzpsL4&t=187s

https://www.youtube.com/watch?v=LUp2u9wI1fY





올해의 영화 : 소울 (soul)  

네가 힘든 순간엔 꼭 다시 이 영화를 만나렴. 언젠가 또 산다는게 지치고 견디는 무언가가 될 때면.

2018년 할머니와 똘이의 죽음. 이전에는 죽음이나 상실을 제대로 겪지 못했던 나는 줄곧 죽음의 의미와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곡해해왔다. 어찌저찌 열심히 살아도 죽음은 그저 모두에게 평등하기에 굳이 열심히 살 필요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생의 시간을 최선, 그리고 열심으로 생각했지 '즐김을 행하는 것' 으로 생각하지 못한 나는 매우 어리석었다.  소울은 죽음과 탄생이라는 생의 양극단을 두고 생이 흐르는 시간, 그리고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태어나기 싫은 어떤 영혼이 삶을 미리 경험하며 단지 처음 베어문 피자 한 입과 가을 늦은 오후의 석양빛 아래 흩날리는 낙엽을 만나고 삶을 만나고픈 의지가 생겼듯이, 생의 아름다움이란 나를 지나가는 '어떤 순간'을 즐기는 데 있는 것이다. 큰 의미나 거룩한 명분은 나라는 존재 아래에 있는것이지, 내가 그것을 손에 쥔 채 시간을 견딜 필요는 없는것. 할머니와 똘이는 내게 그런 의미를 선물한 채 떠났고 소울은 몰랐던 그 의미를 찾게해 준 영화다. 



     

올해의 책 : 

- 에세이 부문 : 양효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 소설 부문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이 카테고리가 가장 고민이 많았다. 생각외로 올해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읽고싶지 않았던 월 1회 회사의 필독 도서 덕에 양적 성장은 어마무시했다만 나피셜 베스트셀러에 그 책들은 단 하나도 노미네이트되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알리며...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대략 정리하자면 우리 모두는 정상으로 치부할 수 없으며 비정상적 면을 가진 불구이나, 우리는 실체없는 '정상'이라는 범주의 틀에 우리를 끼워맞추려 자신을 '비정상'으로 낮추기보다는 비정상인 자신 그대로 사랑하라는 이야기. 올해 사랑하는 후배가 건넨 '선배는 자신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어요'라는 말과, 난 기억하지 못하나 남자친구가 말한 내 술꼬장 '난 내가 너무 못미더워, 00아'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었는데 어쩌면 나에게 다시 한번 책을 펼치라는 우주의 신호일수도. 

<멋진  신세계>는 말로 풀어 의미를 설명하고픈 소설이라기보다는 50년도 더 된 옛 시절, 인간의 가능성이 절제되버린 비 인간적 미래 시대에 대해 상상한 작가의 상상력과 디테일, 서사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압도했다는 점에서 올해의 서적에 올랐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며 고안된 어떤 미래가 도리어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막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그리고 인간다운 삶은 어떤것이 필요할런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가의 의도는 아름답고 거룩했다.  





올해의 여행 : 거제도 내도 여행. 

코로나가 일상을 수세에 몰아간지도 어언 2년차다. 공식 여행친구인 만수와 삼척, 남양주, 남해, 양양, 설악, 인제 등등 알차게 돌아다녔고 최고를 하나만 뽑기에는 여의치 않을 정도로 모든 여행지가 좋았다. 그 중에서도 통영과 거제를 돌아다닌 여행이 올해의 베스트였는데, 사람도 원주민도 없고 카페, 식당, 상점은 물론이고 매점마저 시간제로 운영하는 고요한 이 곳은 숙소 안에 시계조차 없을 정도여서 오래 머문다면 세월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를 참이다. 빈약하게 먹을거리를 가져온 우리는 알차게 식사를 만들어먹고 흘러가는 바닷물과 자욱한 안개를 보고 빗소리를 bgm삼아 겨우 사온 옥수수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셨다. 이사 준비로 허리를 삐끗해 근육통이 도졌던 나는 남자친구의 권유로 겨우겨우 트래킹을 하며 내도 전망대에 올랐다. 날이 개거나 좋아서 또 가면 더 나은 감상이 들 지도 모르겠으나 바로 건너편의 섬을 짙게 가리는 난생 처음 본 진한 해무와 토닥거리던 빗소리, 그 아래에서 지낸 이틀은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될 것.   


     




올해의 사건 : 이사. 새로운 공간 아래 다르게 쓰여지는 일상의 점과 시간.  

절친의 결혼, 먼 곳에서 살던 친구의 긴급한 귀국, 그리고 남자친구의 제대, 회사 생활의 참새방앗간이자 대나무숲이 되어준 돼지 캠프의 잠정 중단 등등 다양한 사건이 있었지만 으뜸은 역시 사는 공간의 변화다. 

얼마전 남자친구와 '삶의 근본을 쉽게 의식주로 표현하는데, 이 세가지 요소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며 짧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처럼  '주'는 인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친다. 넓어지고 트인, 그리고 제 역할과 자리가 생긴 좁다란 십몇 평의 공간 안에서 나의 세계는 넓어지고 생각의 영역도 뻗혀져나간다. 

이사를 온 무렵 브런치에 쓴 글을 보았는데, 이 글이 어쩌면 내 마음을 꼭 담고 있더라.

 휴식과 수면과 공부와 탈착의와 tv시청과 식사와 수납이 혼재된 공간에서 나는 당최 무엇을 해야하는지 늘 배회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맴맴 돌던 삶을 서랍에 차곡차곡 개어넣은 느낌이다. 사는 모양이 깔끔하고 담백해졌다. 





올해의 식생활 : 하이브리드 비건의 시작.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고통받는 염증 3대장중의 하나는 다름아닌 방광염이라나 뭐라나. 올초 방광염 진단 후 별것아니니 곧 지나가겠지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아뿔싸, 이 친구는 내 방광 언저리를 맴맴 돌며 불쾌감이 24시간 떠날줄을 모른다(고속버스 안, 막히는 고속도로 위 화장실 가고 싶어 실수하기 직전인 그 기분을 24시간 느낀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거다). 내과약 처방으로는 말을 듣지 않아, 재택업무 시간을 쪼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늙은 할저씨 의사 선생님이 계신 동네 산부인과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할저씨 의사선생님이 건넨 한마디 "아...염증수치가 높네요. 내가 사정을 잘 모르지만, 지금 몸도 정신도 많이 힘들죠?"에 와르르 무너지며 울고 말았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세포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를 새겨넣는 성격인데 이를 고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테고, 당장 바꿀 수 있는 무언가라도 하자는 마음에 시작한 '폴로 비건' 생활은 생각외로 일상에 잘 맞아주었다. 송년회, 모임이 있을때는 맛나게 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그 전에는 절대 몰랐던 채소와 야채, 과일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도 산뜻하고 즐거웠다. 내년,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이어나갈 예정이고 좀 더 식물의 비중을 높여보기로 마음먹어본다. 



올해의 식당 : 홈 쿡 황금기. 회나무로 피자 & 연어 브라써리.  

연동해 둔 구글 사진첩에 [food]를 검색하니 레스토랑 사진보다 집밥 항공샷이 더 많은데 말이 되는 일인가. 거리두기로 집밥을 많이 먹을수밖에 없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사를 하면서 생긴 변화는 주방이 이전보다 훨씬 넓어지면서 다양한 요리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봄/여름에는 오만가지 피자, 가을/겨울에는 연어를 활용한 갖가지 요리(샐러드, 빠삐요트, 파스타 뭐 기타 등등)를 했고, 마침 거리두기로 바깥 모임이 어려우니 몇몇 친구들과 집들이겸 홈파티를 하면서 요리 실력이 꽤나 늘었다. 비건 지향식을 시작하면서 사 먹는 요리들은 대부분 육고기가 들어가있으니 집에서 요리를 많이 한 것도 한 이유겠다 싶다. 매우 여담이지만, 내년엔 생선요리 왕이 될거다!     




올해의 공부 : 사업 기획의 시작. 

막연하게 나의 것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긴 했다. 실체화가 늦었던 이유는 나의 자본과 시간을 나의 것에 들이는 것에는 막연한 두려움부터 나에 대한 불신까지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전 직장부터 가져왔던 나의 작고 소중한 아이템을 작게라도 세상에 보여주고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던 한 해였는데, 어쩌면 올해 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생긴걸까.  초반에는 남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워 조용히 나 홀로 조용히 필요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어차피 세상에 보여줄 것을 주변 조언들을 들어보는것도 좋을 듯 보여 지인들에게  떠벌떠벌 이야기를 해 보았다. 생각보다 진심으로 귀를 내어주는 친구들, 조언을 해 주는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유관 지인을 소개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더 많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 내년은 사업자 발급부터, 위치 서치, 상품 개발까지. 할 일이 많다. 




올해의 지름 : 차. 출고전쟁 속 아직도 입고미정  

작년엔 내가 가진 컴플렉스 중 가장 큰 하나였던 '모빌리티'를 해결하겠다며 늦깎이 면허시험공부에 나섰고, 올해는 당당하게 거머쥔  ★2종 보통★을 쥐고 올 여름 멋지게 발주를 넣었다. 그리고 안 사본 티 팍팍 나게... 발주하면 차가 뿅 나온다고 생각했다. 시국상 국내 모빌리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발주량이 늘었는데, 쉬핑 이슈, 자재부족에다가 반도체 문제가 터치면서 납기가 줄줄이 늦어지고 연쇄작용으로 중고차가 비싸지고. 이런 자동차 전쟁 속 아직도 내 차는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1월에는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던데, 그렇다면 1월부터 나는 차 연수를 빙자한 근교 여행으로 미리 연락이 어려울 예정이라는 점을 알린다. 사실 솔직하자면 지름은 여러개 더 있긴 했다. 인생 최대의 쇼핑 '집 쇼핑'과 하만카돈 오디오. 거실에 놓은 빈백 소파 기타 등등등...



올해의 패션뷰티 : 취향 없음. 유니폼 구해요. 

작년에도 거의 옷을 안 사긴 했었는데 올해는 정말 유별나다. 고 스티브 잡스는 옷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검은 터틀넥 티와 청바지를 여러벌 구입해두고 신경쓰지 않으면서 살았다던데 정도껏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성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시기는 오래고, 브랜드와 유행의 팔로워에서 낙오된지도 오래다. 다만 나다움을 찐득하게 표현해줄수있는 시그니쳐에 대한 고민은 지속되는중. 

뷰티는 색조 화장품 등 소위 '그림 그리는' 아이템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고, 갖가지 기초 화장품과 세안 루틴으로 좋은 캔버스를 만들려는 노력은 지속되는 중. 특히 이젠 빼박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탄력에 대한 집착이 새록새록 생기는 중이다. 회사 스트레스가 격해지면서 이 스트레스가 다 얼굴 세포로 몰려드는지(...) 짙어지는 다크서클과 세로 모공에 대해 관심이 많이 생겼다. 사족이지만 여러 브랜드를 돌려가며 사용해본 결과 K뷰티의 선두주자 아모레 계열의 제품들이 역시나 한국인 피부 관리에 최적화된 아이템이었다... 아. 또 팩은 생각났을 때 이벤트성으로 쓰고 다음이란 기약없는 이런 무계획 루틴보다는, 슴슴한 성분의 팩을 몇일 연속으로 하다보면 효과가 빨리 드러난다. 하잘것 없는 화린이의 뷰티팁은 디렉터 파이와 화해 그리고 주변의 추천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쭈욱....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분갈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