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래서 영주권은 어찌 되었나요?

캐나다 워홀러의 우당탕퉁탕 위니펙 이야기

by 위니 더 조이

결론부터 말하겠다. 아직 별 진전이 없다. 위니펙에 머무는 2년 5개월 동안, 영주권 진행 시작이라는 문턱도 못 넘었다.


워킹 홀리데이의 자체도 의미 있지만, 위니펙에 온 나의 궁극적 목적은 캐나다 영주권을 따는 것이었다. 분명 위니펙은 타도시에 비해 영주권을 따기 수월하다고 들었다. 평균 영주권을 따는 데에 2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위니펙에 들어온 순간부터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코로나의 영향을 받아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집값 폭등의 문제 등으로 인해 캐나다 정부에서 이민 문을 걸어 잠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내가 받은 건 워킹 홀리데이 1년 비자였다. 이 1년 안에 드로우(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드로우에 뽑혀서 영주권 과정이 시작된다)에 뽑혀야 하므로, 이에 가장 유리한 것이 빨리 직업을 구해 6개월의 일 경력을 빨리 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6개월 일을 하면 매니토바 일 경력 점수로 500점을 확보하기에 사실상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특히 요리사라는 직업은 티어가 높으므로, 영주권 진행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한식당에 취직했다.


한식당에서 일주일에 약 30-32시간 정도를 일했다. 위니펙에서는 풀타임, 즉 정직원 기준이 30-40시간 노동이다. 시급은 한 달에 약 15불, 2주마다 페이를 받았는데 버는 돈은 작았지만 생활하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점심시간 및 야근 포함 일주일에 약 50시간 이상은 회사에 머물고, 지옥철에서 하루 2시간씩 출퇴근을 하는 삶을 살다가, 노동 시간 자체가 줄어드니 삶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나는 산책을 하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뜨개질을 하고, 낮잠을 엄청나게 자는, 말 그대로 힐링의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영주권이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일한지 6개월이 지나, 영어 시험까지 보고 그 점수까지 합산해 드로우에 넣어두었지만, 드로우는 진행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진행한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사람을 적게 뽑았기 때문에 드로우에 뽑히는 최저 점수대가 너무 높았다.


점수는 나이, 학력, 6개월 경력, 최근 5년 동안 풀타임으로 일한 경력, 영어 점수 등으로 구성된다. 내 점수대는 800점대. 충분히 높은 점수였다. 그 당시 작년까지만 해도 평균 드로우에 뽑히는 점수대가 600-700점대였다. 나는 수월하게 뽑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로우 최저 점수는 800점대 중반으로 치솟아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워킹 홀리데이 정책이 바뀌어 2년의 워킹 비자를 추가로 연장할 수 있었다. 비자를 연장한 후에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넘어갔지만,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던 드로우는 아예 멈춰버렸다.


나보다 먼저 위니펙에 왔던 한식당의 동료들은 한명씩 영주권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주권 이후의 삶을 고민하고 있을 때, 영주권 진행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드로우에 뽑힌다는 첫 단추조차 꿰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삶에 대해서도 약간은 회의가 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영주권을 따지 못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력도 이미 단절이 되었고, 한식당에서 근무하는 것으로는 영어 실력을 늘리거나 캐나다의 사회를 충분히 경험했다고 보기 어려워 좋은 경력이라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좋아하고 따르던 선배가 새로운 팀의 팀장이 됐다고, 회사로 다시 합류할 의사를 물었다.


“캐나다에서 원격으로 면접을 보고, 귀국해 팀에 합류하면 될 거 같아요. 회사로 돌아오는 꿈 꿨다고 했죠? 어머, 예지몽인가 봐.”


선배의 제안은 솜사탕이나 다름없었다. 앞길이 불투명할 때 온 확실하고 안정적인 제안, 정말이지 달콤했다.


사실 일 년 간 여전히 회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꿈을 많이 꿨다. 다시 입사하는 꿈도 생생하게 꿔서 눈을 뜨면 캐나다라는 게 생소한 적도 많았다.


그 이유를 잘 알았다. 내 안에 후회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이 힘들었지만 내가 즐기는 아동 문학이라는 콘텐츠를 다루는 직업이었다. 한번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출판계에서는 알아주는 회사인데. 좋은 기회를 이렇게 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까?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침마다 지옥철에 몸을 우겨넣고, 제작팀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혹시 인쇄가 잘못 됐나 싶어 심장이 덜컹 떨리고, 함께 일하는 작가가 일정을 지키지 못해 마케팅 팀, 디자인 팀에 고개를 숙여야 하거나, 컨펌 메일을 받을 때마다 긴장감에 목이 타던 기억들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새가슴이 되어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게다가 눈이 충혈될 때까지 모니터를 봐야하는 미래는 당연지사였다. 눈을 아낄 수 있는 직업이 결코 아니었다.


“제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 비자 끝날 때까지는 있어 볼게요.”


감사를 담아 거절을 전달했다. 그때 나는 다시금 결심했다. 영주권이든 뭐든, 위니펙에 남아 있는 동안은 그저 이곳을 즐기겠다고. 내게 주어진 이 기회와 시간을 모조리 쓰고 가겠다고.


그때 위니펙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위니펙을 총 두 번 선택한 사람이니.


그리고 그 다음달, 운이 좋게 친구가 날 추천해 주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서버로 파트타임을 얻었다. 온전히 영어만 쓰는 환경과 캐나다의 노동 환경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일을 한 지 약 1년하고도 9개월이 되던 달, 한식당에서 해고를 당했다. 사유는 식당이 다른 주인에게 팔려 영업 아이템이 바뀔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그만 둘 시기를 고려하던 차였다. 덕분에 돈을 벌어 삶을 영위하고, 외국인 동료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식당에서 영주권 진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쉽게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아깝게 되었다.


그리고서 바로 다음 달, 호텔에서 풀타임 잡을 얻었다. 호텔이 몇 개월간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했는데, 마침 내가 해고를 당하던 달과, 공사 후 그랜드 오픈을 하는 시기가 맞물려 직원이 필요하던 차였다.


직업이 바뀌어 한식당에서 일한 6개월 경력 점수는 무효화가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풀타임 6개월을 다시 채우는 중이다. 현재까지 호텔에서 풀타임으로 4개월을 일했으니 2개월 뒤에 6개월 점수를 채워서 다시 드로우에 넣을 수 있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끝까지 해 볼 생각이다.


여전히 드로우는 하지 않는다. 여기서 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을 위한 드로우나, 해외에서 숙련된 노동자를 뽑는 드로우를 간간히 진행하긴 하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시기를 잘 타, 영주권을 1년 만에 딴 누군가가 말했다.


“영주권은 그냥 종이 한 장일 뿐이야. 별 거 아니라는 거지.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하지만 영주권 진행조차 들어가지 못한 나에게, 그의 말은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한마디로 너무 질투 나고 부럽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약 8개월. 이 안에 나는 승부를 볼 수 있을까? 또는 시간을 벌기 위해 워크 퍼밋을 연장할 수 있을까? 캐나다는 날 품을 수 있게 되려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운명은 또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분명한 건, 위니펙에서 살면 살수록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어진다는 것. 캐나다가, 위니펙이 너무 좋다는 것. 내 남은 삶을 이곳에서 숨 쉬고 먹고 잘 수 있기를 강렬하게 바래본다.


신호등 빨간 불.jpg 영주권 진행은 현재 빨간불 상태


무지개와 레지스트레이티브 빌딩.jpg 이렇게 아름다운 위니펙에 계속 살고 싶은데 말이지_레지스트레이티브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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