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한식당 일은 어땠나요?

캐나다 워홀러의 우당탕퉁탕 위니펙 이야기

by 위니 더 조이

위니펙에서의 첫 직업, 한식당 요리사. 나는 워홀카페에 올라온 구인광고를 보고 한식당에서 풀타임 잡을 얻게 되었다.

닭 요리를 메인으로 하는 한식당으로, 치킨을 튀기고 닭갈비를 볶고 그 외 국물 메뉴, 김밥 그리고 빙수 디저트를 파는 식당이었다. 엄청난 알바 이력을 가진 나였음에도 살면서 식당에서 일한 건 처음이었다. 재료 손질이나 요리하는 것, 디저트를 예쁘게 데코하는 것에도 재미를 느껴 무척 빠르게 배웠다.


회사에서는 한 권의 책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으면,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구상부터 기획, 실행 및 과정, 그 사이의 끝없는 피드백과 회의가 이어져 인쇄 및 마케팅까지 진행해야 하나의 결과물이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독자가 책을 읽어야 하고, 피드백을 남기는 순간까지 고려하면 몇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긴 과정이다.


하지만 요리는,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15분 안에 접시 위에 완성된 형태가 놓여야 한다. 즉각적인 완성이 가능하고 손님의 피드백도 굉장히 빠르다. 그런 점에서 요리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식당 일은 이미 레시피가 정해져 있고 그것을 잘 따르고 일정한 맛을 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고, 기발한 창의력을 요해 아이디어를 쥐어짜야했던 지난 회사 일에 비해 단순반복적인 일이 많았다.


가령, 출근하면 튀김 공간을 세팅하고, 소스를 채우고, 파와 숙주를 씻고, 양파를 까서 자르고, 그 과정에서 나온 설거지를 하고, 테이크아웃용 종이 박스를 접고, 소분을 하고, 요리를 하고, 손님 테이블에서 나온 설거지를 하고 마감을 할 때는 청소를 하고.


매일 매일이 똑같았달까. 그러니 초반에 일을 익히고나면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몸이 알아서 일을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설거지를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한때 회사에서, ‘차리리 설거지 일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져서. 역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나 싶어서.


하지만 괴로운 것도 있었으니……. 요리사라는 직업은 육체노동이 상당했다. 일 초반에는 아침저녁으로 손가락이 저리고 뻣뻣해져서 손가락을 펼 때마다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관절이 굳어버린 좀비가 쩌저저적 갈라지고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을 억지로 펴 재끼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하루 종일 서 있으니 발바닥 통증도 상당했다. 안 그래도 평발이라 발바닥 피로를 쉽게 느끼는 편이었는데 이번 기회로 내가 부주상골증후군으로 추정되는 발 통증 질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와 어깨 통증, 손목까지 아픈 곳이 주렁주렁 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마더스 데이(어머니의 날)은 손님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동시에 네다섯 개의 요리를 해야 하는 순간도 있어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주문 실수가 나지 않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고, 멀티태스킹 강도도 높았다. 그런 날은 마감할 때 화구 주변에 기름때를 더 문질러야 했고, 설거지의 양이 어마어마해 밤늦게 퇴근하기 일쑤였다.


팀워크 역시 중요했다. 손이 빠르고 눈치가 빠른 동료와 일을 하면, 재료 준비부터 요리, 세팅, 마무리 데코까지 해서 한 몸인 것처럼 척척 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동료와 일을 하면 주문이 꼬이고 속도가 느렸다. 착착 맞아 떨어지는 하루를 보내면, 뿌듯한 마음이 들고 한 팀이라는 자긍심이 들었다.


2주급으로 버는 돈은 약 850달러, 한 달로 치면 약 1600-1800달러. 한국 돈으로 환산했을 때 한 달에 약 160만원에서 180만원을 번 셈이다. 레스토랑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이 식당은 키친 스태프들도 일하는 시간에 따라 일부 팁을 받았다. 급여와 함께 2주마다 받는 팁은 약 80-120달러 정도로, 한 달로 쳤을 때 한화로 약 20만원의 추가 수입이 들어왔다.


한 달에 약 200만원의 총수입. 사실상 많지는 않은 수입이었다. 하지만 이 돈을 아끼고 아껴 월세도 내고 버스비도 내고 생활비도 하고 심지어 저축도 했다. 일 할 때는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해 주니, 일부 식비를 아낄 수 있었고, 정말 필요한 겨울옷이 아니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서 놀 때는 제외하고는 식재료를 사서 집에서 먹고 싶은 걸 해 먹었다. 파스타는 기본으로 간장찜닭이나 닭곰탕, 오삼 불고기 심지어 감자탕까지. 술이나 담배 그리고 커피를 즐기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걸 빼면 간식비도 크게 들지 않았다. 자린고비 그 자체였다. 모든 워홀러가 그렇듯이.


한식당에서 가장 좋았던 건 여러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선생님이 되었지만 당시 교육학과 학생이었던 필리핀계 캐나다인 레이첼, 내게 일을 처음 가르쳐 주고 항상 코스트코에 데리고 가 주었던 홍콩에서 온 캐롤, 배려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마음씨 따뜻하고 어예쁜 한국인 친구 S 등.


하지만 모두가 좋았던 건 아니다. 회사에서는 책이라는 콘텐츠를 좋아하고, 기본적으로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관심사가 통했다. 하지만 이곳 위니펙의 한식당은 다양한 사람이 모인 곳인만큼 나와 취미가 맞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떤 동료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해서 나를 감정적으로 지치게도 했고, 어떤 동료는 게을러서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또 어떤 동료에게는 참고 참다가 결국 따로 전화를 해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원래 나는 대체로 참고 수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오죽했음 그랬겠냐고.


초반에는 즐거웠던 일들이 사람들 때문에 지치고 힘들어져 점점 스트레스가 쌓여 갔다. 일도 단순반복이니 지루해졌다. 영주권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일이 진행되지 않으니 이곳에서 일을 하는 내 노동력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친하게 지냈던 레이첼이 그만두게 되고, 캐롤도 나와 서로 일하는 시간이 완전히 반대가 되자,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도 줄었다.


호텔 일을 얻을 때, 한식당에 파트타임으로 전환하겠노라고 사장님과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나 역시 매몰찰 수가 없었는데, 맞물리는 시프트로 돌아가는 식당 특성상 내가 빠지면 곤란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헤드 셰프가 쉬는 날, 그를 대신해 메인으로 일을 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이제 그만둬야지, 언제쯤 이야기하지, 하고 생각하던 차에 2주 뒤에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책임감을 갖고 식당 사정을 고려했는데, 식당은 전혀 고려해 주지 않는구나.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이쯤에서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겠어.


그렇게 마지막 2주를 보내고, 한식당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나는 호텔에서의 시프트를 늘려갔으며 그 다음 달 풀타임으로 전환에 성공했다.


지금은 한식당에서의 일이 한 달 정도의 시간이라도 느껴질 정도로 응축되어 버렸다. 가끔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영주권 진행도 못했고, 한국인 동료들가 많았기에 영어도 크게 늘지는 않았다. 게다가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도,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연장 근무 페이를 받지도 못했다.


이 모든 아쉬움 속에서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건, 그 당시로서는 영주권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열심히 했다. 그러니 우선 그 시간을 견딘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아, 한 가지 더 분명한 것. 앞으로 살면서 요리사라는 직업을 다시 가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식당 근무 중 ‘흑백요리사’가 방영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나름 요식업에 종사하는 것에 자긍심도 느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나는 요리사가 어떤 일인지 ‘찍먹’만 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요리사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레이첼 신발.jpg 십대 시절부터 무려 약 5년간 근무했던 동료 레이첼의 신발 상태


붓고 관절마다 아픈 손.jpg 바쁜 다음 날이면 손이 퉁퉁 붓고 관절 마디가 아파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한식당 일.jpg 일주일에 한번씩 했던 화구 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