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때로는 위로가 된다는 역설
삶의 끝에서 오늘을 바라보다
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신이 그의 몸에 투명한 포스트잇을 붙여준다는 상상. 그 투명 종이에는 그들이 각각 세상을 떠나게 될 날짜와 시간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마치 상품에 적힌 유통기한처럼. 그런데 포스트잇의 접착력이 애매한 탓에, 어떤 사람에게는 종이가 팔랑 날아가 평생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손에 꼭 쥐게 만들어서 언제든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것이 되며,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발견하는 존재가 된다.
현실에선 어떨까. 실제로 어떤 사람은 평소에 죽음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느 한 곳이 불편해 시한부를 의식하며 살아가고, 또 어떤 이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느닷없이 시한부를 선고 받는다. 언뜻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게 축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세상을 등지는 분들이나 마음의 준비랄 것도 없이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분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진실은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하고 평생을 후회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사실 우리 중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이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진실한 명제에 대해 언급을 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한 줌의 재로 돌아갈거야"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지금 열심히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딱히 이렇다할 계기가 없는데도 누군가가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늘 같이 좋은 날 왜 그런 얘기를 해?"라며 도중에 제지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다는 진실이 꼭 모두에게 불편하기만 한 터부인 것은 아니다. 지금 행복한 누군가에게는 상실의 공포를 줄 수 있지만, 지금 고통스러운 누군가에게는 뜻밖의 위로를 주기도 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존재의 이유를 찾아 헤매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위로를 건네주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 진실에 위로를 받았던 수혜자였기에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이를 잃어 슬플테니, 얼마간은 쉬어도 괜찮다." 내가 요청한 적도 없던 애도 기간을, 나를 둘러싼 사회가 허했던 날. 그 날 나는 가족과 예상치 못한 사별을 했다. 조금 전까지도 분명 밝게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나눴던 가족인데, 당신께서는 잘 가겠노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믿을 수 없었다. 오래도록 함께할 거라고 믿어왔던 가족과의 일상이, 언제든 산산조각 날 수 있는 유리 낱장 같은 존재였다니. 이미 오래 전 또 다른 가족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잃었기에, 또 다시 이런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터였다.
신이 붙여준 포스트잇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아온 죄, 당연하게만 보였던 일상이 영원할 거라 착각했던 죄로 나는 큰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또 다시 찰나에 잃을 수 있단 것을 상상하지 못한 죄의 대가는 혹독했다. 준비 못한 이별, 그 이전까지의 모든 순간이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그게 마지막 식사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대충 먹고 후다닥 나오지 않았을텐데.'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 알았더라면, 잘 다녀오겠노라고 손만 흔들지 않았을텐데. 정말로 사랑한다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가족으로 태어나겠노라고 꼭 안아드렸을텐데...' 뒤늦은 후회들이 날 집요하게 괴롭혔다.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나의 모순과 죄책감을 확인시켜주는 과정 같았다.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가면 무탈하게 지나간대로 괴로웠고, 하루가 힘겹게 지나가면 힘겹게 지나간대로 괴로웠다. 무탈한 날엔 사랑하는 이가 떠난 마당에 내가 이렇게 잘 지내도 되나 싶었고, 힘든 날엔 날 항상 위로해주던 가족의 빈 자리가 더 크게 보여서 힘들었다. 마치 온 세상이 내가 힘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눈 앞에 펼쳐놓은 듯 했다. 이별을 처음 통보받은 순간부터 안온한 일상 속에서 괴로워한 순간까지, 심지어는 나를 위로하려 했던 모든 선의조차도 일방적인 강압으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스스로 고통을 견딜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감각했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너절너절하게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더이상은 방치하면 안 될 상태였다. 그 누구도 날 위로해줄 수 없다면, 나라도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찾아낸 문장이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기에, 내가 생각해냈다고 하기에도 겸연쩍고 민망한 이 한 문장.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클리셰나 다름 없는 이 진부한 한 마디가, 그 때의 내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줬다. 나와 이별한 가족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나고 있거나, 떠날 것이라는 진실. 가족의 부재를 한없이 슬퍼하고 있는 나 역시 언젠가 스러져 없어질 거라는 것. 그래서 먼 훗날에는 누가 누구의 죽음에 슬퍼했더라는 기억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것. 벌어진 틈새 하나 없이 완전무결한 이 죽음의 명제가, 한때는 한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던 이 한 문장이 그 어떤 말보다 나를 따뜻하게 위로했다.
왜일까, 자문해봤다. 답은 간단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문장에는 "지금 너의 고통은 너만의 고통이 아니다"라는 위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나만의 고통, 떠난 가족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연대의 위로가 내게 통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문장은, 날 스스로 괴롭힌 근본 원인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는 걸 방증해주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족을 떠나보내고 힘들어했던 이유도 단지 그리움이나, 안온한 일상과 내 고통스러운 마음의 괴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애도의 기간이 끝나자마자, '떠난 가족이 세상에 있기라도 했냐'는 듯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사회를 바라보며 홀로 느꼈던 지독한 외로움, 바로 그것이 날 힘들게 한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너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던 죽음의 명제는 나를 위로해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로만 고정했던 시선을 주변으로, 더 너른 세상으로 둘러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도 갖게 됐다. 실제로 나를 향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보니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죽음과 무관하게 살아온 존재가 없었다.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냈고, 누군가는 지금 이별하고 있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존재도 아프지 않은 존재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죽음의 명제가 내게 알려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존재가 아픔 자체를 피할 수는 없어도 선택할 여지는 있다는 것이었다. 아픔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말하자면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의 여지였다. '어차피 아픈 인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면서 살자. 내 통증만 생각하지 말고, 주변에 더 아픈 사람도 도와주자.' 그 때의 나는 이 보기를 택하면서, 나만의 인생 철학으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웃고 감사해 하며, 때때로 주변을 둘러보고 작게나마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그래야 떠난 가족도, 남겨진 나도 서로에게 덜 미안할 테니까. 그래야 언젠가 서로 만났을 때, 웃으면서 나눌 에피소드도 많아질 테니까.
물론 나는 작심삼일 전문가라 실천이 쉽지는 않았다. 떠난 가족을 떠올리기만 하면 요즘도 눈물을 참기 바쁘다. 주변에 아픈 사람을 돌아보기로 한 다짐도, 내 통증이 욱씬거릴 때마다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나는 역시나 작심삼일 전문가여서, 이런 실패도 까맣게 잊곤 한다. 시치미를 뚝 떼고는 마치 처음 시도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내게 시작할 힘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상상 속, 신이 붙여준 포스트잇이다. 비록 언제 어디쯤에 있을지 모를 내 삶의 끝이지만, 그 존재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더 값지고 더 소중해진다. 어떨 땐 엉망진창인 것 같던 하루도, 그저 내 삶의 끝을 잠시 떠올려보기만 하면, 의외로 감사한 순간이 많은 날로 순식간에 재구성된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젠가 우울할 때가 있다면 한 번쯤 시도해보시길.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데 이만한 비법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