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전시회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각종 언론에 대서특필된 그의 그림들이 아니라 깨알같은 친필 기록들이었다. 세계적인 명작을 만들어낸 스케치부터, 그 스케치에 덧댈 유화 물감 같은 재료 정보, 작품의 대여비, 수익금,수상 내역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기록한 그의 치밀함과 섬세함이, 그의 숱한 명화들보다 내 눈을 오래 사로잡았다. 호퍼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넓은 색면과 널찍한 여백인데, 내가 좋아하는 그 두 가지가 이토록 치밀한 계산 끝에 나왔다는 걸 처음으로 직관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록들 중에서도, 특히 여백에 관한 설명들이 한동안 내 시선을 붙들었다. 주인공도 아니고, 그냥 배경에 불과한 여백이 그의 그림 설명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기록도 그랬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유리창틀 바닥을 따라 캔버스 4분의 3을 가르는 일렬로 놓인 청록색 타일. 밝은 색의 벽. 오른쪽 주방으로 향하는 누르스름한 황토색 문. 바깥의 밝은 보도, 옅은 초록색. 검붉은 벽돌집, 맞은편. 가게 바깥, 어두운 녹색. 가게 안의 밝은 천장이 어두운 바깥 거리에 대비됨." 간결하게 뚝뚝 끊어 쓴 이런 설명체는 뉴욕의 한 식당에서 밤을 지새우는 등장인물들이 아닌, 여백과 배경에 4분의 3이 쓰였다.
왼쪽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작품. 오른쪽이 이 작품과 관련한 호퍼의 친필 기록.
이번 전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햇빛 속의 여인> 기록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여백에 맺힌 빛에 대한 기록이 상세했다. "가장 밝은 부분은 오른 쪽으로, 그림 밖의 태양이 마찬가지로 그림 밖의 동향 창문에 달린 커튼을 비춤. 바닥에 햇빛의 경로, 창백한 노란색에 창백한 녹색이 감돎. (태양이 더 높이 뜸에 따라 햇빛의 경계도 함께 올라갈 듯 그려진 것에 주목할 것.) 더 멀리 동쪽을 바라보는 언덕면에 비치는 햇살. 바깥 하늘은 아직 어슴푸레해서, 방 안도 온통 청록색." 결국 이 작품에서도 그가, 나체의 여성 주인공 이상으로 집중한 것은 빛에 따라 공간감이 달라지는 여백 그 자체였다.
왼쪽이 '햇빛 속의 여인' 작품. 오른 쪽이 이 작품과 관련한 호퍼의 친필 기록.
그가 여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덕에, 그의 작품 속 여백은 점점 더 여백답게 비워졌다. 여백을 채우는 빛과 색감 같은 여러 요소들을 정교하게 계산하고 실행에 옮긴 덕분에, 여백이 더욱 여백답게 비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보며 각자의 삶의 한 순간을 떠올리며 공감하고 있다. 그의 여백이, 마치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냈던 나의 일상 속 한 장면을 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해하거나 아련해하면서. 그렇게 그의 여백은 시공을 초월해 많은 이들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 어느 한 구석을 툭 건드린다. 치밀하게 준비했으면서 마치 무심결에 그랬다는 듯이, 툭.
'밤의 창문 (Night Windows)'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잘 비워야 잘 채울 수 있다. 야식으로 가득 채운 뱃속도, 스트레스로 꽉 찬 머릿속도, 심지어는 거미줄처럼 얽힌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대충 비우는 게 아니라, 잘 비워야 차곡차곡 내가 원하는 것들로 다시 잘 채워넣을 수 있다. 결국 호퍼가 일생에 걸쳐 그려낸 수많은 여백과 이를 위한 치밀한 기록도 '잘 비워내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그가 1969년에 한 언론 인터뷰를 내키는 대로 이렇게 바꿔도 내 귀에는 딱히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비워내고 잘 채워가는 과정이 계속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Blackwell's island'. 팍팍한 현실 속 강물 위에 비친 윤슬은 마치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희망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