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미국의 한 전시회에서 말그대로 '난데 없는' 작품이 내걸렸습니다. 포장테이프로 벽에 탁 붙어있는 바나나 한 개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과일가게에서 사면 1달러도 안 했을 바나나가, 당시 미국 돈으로 12만 달러, 우리 돈으로는 무려 1억 4천만 원에 팔렸습니다. 대체 무슨 코미디 같은 일이냐고요? 네, 작가가 의도한 관람객의 반응도 바로 그겁니다. 작품 이름이 바로 '코미디언'이었거든요.
이렇게 지구에서 제일 비싼 바나나를 탄생시킨 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얼마 전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버전의 싱싱한 바나나(?)를 포함한 여러 다양한 작품들과 함께요. 저는 미술을 모르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회를 개막 첫날인 어제부터 부리나케 찾았습니다. 희대의 바나나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 그 직후에 저의 즉흥적인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감탄했습니다. 조금만 비틀었을 뿐인데 예술을 이렇게 쉽고 가깝게 느끼게 하다니, 하고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예술은 하나의 산업이고 예술가는 그 산업 종사자입니다. 우리의 삶 아주 가까이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보통 예술을 쉽게 가닿을 수 없는, 뜻 모를 심연처럼 느끼곤 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평소 많은 예술 작품들을 히말라야의 높고 험준한 산맥처럼 느꼈거든요. 바라보면 멋지고 좋은데, 막상 제가 올라갈 생각을 하면 아득히 멀게 느껴져서 진땀이 나는 그런 존재로요.
그런데 카텔란의 작품은 달랐습니다. 예술이 가깝다못해, 그저 제가 두 발 딛고 서있는 모래사장처럼 느껴지게 했어요. 마음 내키는 대로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가 모래성을 쌓을 수도 있고, 아니면 구덩이를 파서 뜨뜻한 찜질을 할 수도 있는 그런 친근한 존재로 말이죠. 작품 소재들의 진입 장벽부터 낮았습니다. 가령, 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비둘기, 강아지와 어린 아이 같은 친근한 존재부터 히틀러와 교황, 그리고 뉴욕 경찰과 같은 상징적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삼았어요. 늘상 보진 않더라도 최소한 낯설지만은 않은 존재들이죠.
그저 일상적이거나 상징적 존재들의 나열이기만 했다면 감흥이 없었겠지만, 카텔란은 그것들에 재치 있는 균열을 냈습니다. 희대의 학살자인 히틀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형상으로 나타냈고요. 실존 인물인 제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맞아 쓰러진 채 등장시켰습니다. 9.11 테러 직후의 뉴욕 경찰 두 명은 거꾸로 선 채로, 한 중년 여성은 냉장고 안에 앉은 상태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게 했어요. 모두 하나같이 우리의 상식을 비튼 것이죠.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2005년까지 재임했던 제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운석에 맞아 쓰러진 모습.
개인적으로는 이번 전시의 백미는 '시선'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혹 전시회를 가신다면, 작품들의 시선을 한 번쯤 의식해보셨으면 합니다. 옷걸이에 걸려 축 늘어져있는 한 남성은 꼿꼿하게 위를 바라봅니다. 바닥에서 구멍을 뚫고 빼꼼히 나온 남성도 역시 위를 쳐다보고 있죠. 히틀러도 뒤에서 보면 '눈 감고 기도하나?' 싶은데, 앞에 가서 보면 오른쪽 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지금 본인들의 내면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희구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히틀러가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정작 오른쪽 위를 향한 시선은 기도와 거리가 멀다.
반면, 아래로 응시하는 시선들도 있습니다. 딱 세 부류죠. 비둘기와 북 치는 아이, 그리고 숨진 채 축 늘어진 말.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아시겠지만, 이들 셋은 거의 비슷한 높이에 놓여 있습니다. 천장 가까이에서 관람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죠. 저는 천장에 축 늘어져있는 말은 죽은 이의 시선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우리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배제된 소수자 또는 동물을 포함한 자연계의 존재를 빗댄 거라 짐작했어요. 또 유일하게 인간으로 형상화된 북 치는 아이는, 카텔란처럼 초연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비범한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전시회에서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시선을 아래에 뒀던, 북치는 아이.
조형물을 미니어처처럼 아주 작게 만들거나 아예 바닥에 내버려둬서, 시선을 아래로 붙들어놓은 작품들도 많았습니다. 무릎 높이도 안 돼보이는 엘리베이터라든가, 권총을 옆에 둔 채 쓰러져있는 작은 다람쥐, 그리고 강아지와 함께 바닥에 누워있는 남자와 시신으로 추정되는 9구의 조형물들. 모두 한결같이 위에서 아래로, 제 시선을 자꾸만 바닥 쪽으로 단단히 잡아끌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카텔란의 시선 처리 의도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물론이고, 비둘기와 북 치는 아이까지 시선을 내리깔게 함으로써 날 내려다보게 만든 건, 결국 내가 관람객임과 동시에 전시물이기도 하다는 걸 느끼게 하려는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관람객이기도 하고 전시물이기도 하다면 전시와 관람이라는 행위의 경계가 무너질 테고, 그러면 그 틈새에서 예술의 기성 체제를 풍자한다는 의미가 생겨날 테니까요.
그러다 잠시 뒤, 다른 생각이 그 위로 포개어졌습니다. 어쩌면 비둘기와 북 치는 아이와 죽은 말의 시선이,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초탈적 시선일 수 있겠다고요. 즉, 작가가 그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달관주의의 관점에서 세상을 한 번 바라보라고 권유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마치 우리네 인생이란 완전한 희극도 없고 완전한 비극도 없으니 너무 일희일비할 것 없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하고요. 마치 혼돈의 전국시대를 유유자적 노닐던 장자가 달관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멀찍이서 지켜보라고 조언한 것처럼, 카텔란이 제게 같은 조언을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시장을 나서면서 카텔란이 던져놓은 여러 시선 뭉치 중에 '아래로의 시선'을 저만의 굿즈로 챙겨나왔습니다. 그의 작품들에서 읽어낸 것들 중에선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성 체제를 향한 조소도 있었지만, 전 개인적으로 '달관'에 가까운 시선이 더 좋았거든요. 몇 달 후 복직을 앞두고 이런 저런 고민이 많은데, 작은 고민 하나하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며 어깨를 툭 치는 쿨한 아저씨의 조언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챙겨온 그 시선을, 앞으로살면서 어깨가 무겁다 싶을 때 한 번쯤 꺼내보려고요. 가끔 망원렌즈처럼 장착해서 보면, 제 인생이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면서 또 나름대로 괜찮게 보이지 않을까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