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삼삼 Apr 08. 2023

<더 글로리> 문동은이 읽던 책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뒤늦게 정주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은 주인공 문동은이 쓰던 단출한 책장이었다. 어머니와의 다툼 끝에 활활 타버린 그 황량한 방 한 켠 책장에는 그녀가 읽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불과 2초 남짓한 짧은 클로즈업 샷이었는데, 내겐 극중에서 손에 꼽히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문동은이 이런 책들을 읽었구나. 정말 문동은이 읽을 만하네."

 

 그녀의 책장에는 세 종류의 책이 꽂혀 있었다. 하나는 교육 관련 서적, 다른 하나는 자기계발서, 그리고 마지막은 소설이었다. 일단 교육 관련 서적은,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라면 당연히 관심 있게 들여다  만한 책들이었다. 「독서교육론과 같은 학술 서적뿐 아니라 첫 아이 초등학교 보내기와 같은 학부모를 위한 교육 책도 있었다. 얼핏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가 고른 평범한 책들 같기도 했다. 학부모의 관점도 한 번 체크해보려는, 약간의 세심함이 느껴지는 평범한 교사의 책 같달까.   

 

 교육 서적 외에 자기계발서도 이런 느낌과 비슷했다. 제목은 「크게 생각할 수록 크게 이룬다」였는데, 생각의 전환을 통해 성공 방법을 소개해준다는 책이었다. 목차와 소개글을 보면, 패배를 승리로 바꾸는 방법과 공포심을 없애고 자신감을 키우는 방법, 주변 환경을 관리하는 방법과 자기 성장에 목표를 이용하는 법 등을 알려준다고 돼있는데,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분명 요긴한 자기 계발서였다. 물론 문동은의 눈으로 보면 '복수'에 초점이 맞춰지는, 요긴한 실용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선 책들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건, 그녀의 책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소설들이었다. 책장에는 총 여섯 권의 소설이 꽂혀 있었는데, 그 중 다섯 권은 다음과 같았다. 「베니스의 상인」, 「레미제라블 3」, 「젊은 예술가의 초상」,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여진 시기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주제 의식은 모두 달랐지만, 이들의 공통점 하나 있었다. 삶에 대 진지하고 실존적인 성찰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하나씩 살펴보면, 문동은과의 접점도 얼핏 보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만 1파운드를 가져가라"는 판결로 유명한 「베니스의 상인」의 주인공은 안토니오와 샤일록이지만, 사실 막후의 주인공은 포샤였다. 그녀는 얼핏 안토니오 친구의 아내로서만 등장하는 듯 하지만, 실은 재판관으로 변장해 온갖 계략이 난무한 상황을 지략으로 평정한 실력자다.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하면서 자신의 사랑도 놓치지 않은 그녀는, 어쩌면 문동은에게 롤모델이지 않았을까.


「레미제라블」은 총 5부로 구성돼있는데 문동은이 소장하고 있던 책은 딱 하나, 3부였다. 왜 하필 3부였을까. 3부의 주요 에피소드는 테나르디에의 장발장 납치 사건인데, 여기에서 나름대로 힌트를 유추해볼 수 있다. 장발장 여전히 자신의 신원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선을 베풀며 살아갔다. 불한당들을 대하면서도 늘 초인과 같은 침착함과 지혜도 잃지 않았다. 이런 장발장의 영웅적이고 선구자적인 면모들이, 복수를 꿈꾸는 문동은을 매료시켰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3부의 주인공이자 고뇌의 아이콘인 마리우스에게 일종의 공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문동은의 책장에 꽂혀있던 또다른 책들인 「노르웨이의 숲」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다른 듯 닮은 작품들이다. 상실과 성장의 이야기를 뼈대로 삼았지만, 결코 성장 소설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에서는 그녀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비슷한 장면이 여럿 펼쳐진다. 주인공 스티븐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학감 신부에게 억울한 체벌을 당하는가 하면, 그 체벌의 부당함을 교장에게 찾아가 직접 알리기도 한다. 때로는 결박된 채 위협당하지만, 그럼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나아간다.


 문동은이 견뎌내야 했던 팍팍한 삶의 무게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주인공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1948년 독일의 한 가난한 가장인 프레드 보그너다. 와 그의 가족들은 위선적인 카톨릭 신자인 집주인의 이기심에, 석회가 매일 떨어지는 단칸방으로 내몰린다.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의 끝없는 가난은, 문동은이 견뎌내야 했던 끊임 없는 고통 닮았다. 약자의 고통에는 무감각한 사회마저도.


 문정희 시인이 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소설은 문동은이 고른 유일한 국내 소설이었다. 내가 읽지 않은 유일한 소설이기도 해서 중고책으로 틈틈이 읽어보는 중이다. 문정희 작가 이 소설이 "나의 유년기 소설에 대한 향수와, 젊은 날 이국의 도시를 방황했던 추억에 대한 헌사"이자 "강렬한 의지와 열정으로 세상을 향해 날개를 펼치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바치는 뜨거운 연가"라고 했는데, '젊은 날의 방황'과 '강렬한 의지를 가진 여성'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왜 문동은이 이 책을 읽었는지 알 것만 같다.


 어쩌면 문동은이 고통 속에서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들 버팀목이 되어줬기 때문 아니었을까.  어차피 문동은이라는 인물도 허구인지라 진실을 알 길은 영영 없지만. 인상 깊게 본 드라마를 후기 없이 떠나보내기는 아쉬워서 나마 남겨 본다. 부디 현실의 문동은들이, 유쾌하고 가벼운 소설을 즐기는 상이 오기를 기대하면. 









※ 참고 : 넷플릭스 영상에는 출판사명은 다 가려져 있었다. 책 표지를 확인한 출판사의 경우에만 출판사명을 정확히 기재했다.


1) 「독서교육론」, 하늘 초등교육학 총서. (그 외 저자와 출판사 정보는 불명확함)

2) 「첫 아이 초등학교 보내기」, 저자 방민희, 출판 BBBooks, 2015/11.  

3) 「크게 생각할수록 크게 이룬다」,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 번역 서민수, 출판 나라,  2009/2/10.

4) 「베니스의 상인」, 저자 윌리엄 셰익스피어, 번역 최종철, 출판 민음사, 2010/12/280.

5) 「레미제라블 3」, 저자 빅토르 위고, 번역 정기수, 출판 민음사, 2012/11/5.

6)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저자 제임스 조이스, 번역 이상옥, 출판 민음사, 2013/12/20.

7)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번역 양억관, 출판 민음사, 2017/8/7.

8)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자 하인리히 뵐, 번역 홍성광, 출판 열린책들, 2011/1/10.

9)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자 문정희, 출판 고려원, 1994/9/1.

 


※ 사진 참고 : 넷플릭스 <더글로리> 시즌2 공식 예고편

이전 07화 책 정리와 노후 대책의 상관 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