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와 노후 대책의 상관 관계
feat.김연수 작가
"어휴. 이제 진짜 책 넣을 데가 없다. 팔든지 기부하든지 해야지."
남편이 책장에다 책을 힘겹게 꽂으며 말했다.
"응? 그런가?"
몰랐다는 듯 딴청 피우다가 곁눈질로 책장을 봤다. 확실히 빽빽하고 비좁다. 책상이며, 거실 탁자며, 침대 머리맡이며 온갖 곳에 책을 널브러뜨렸지만, 책장은 여전히 포화상태였다. 심지어 침대 아래에도 책을 수납했건만, 책들이 머물 공간은 턱없이 부족해보였다.
"책은 안 많은데 수납 공간이 좁아서 그래."
"뭐? 책장을 사자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이 책장은 높이만 높고 가로는 좁잖아. 이런 거 말고 촘촘하게 책 많이 들어가는 책장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해서."
"그러니까 새 책장을 들이자는 얘기야, 지금?"
남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책장 소리 한 번만 더 했다간 책들을 홀랑 팔아버릴 기세다.
"아니? 내가 책들 정리할 거니까 걱정 말라고 한 건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걱정은 내가 하고 있었다. 책장 정리를 어떻게 할지가 걱정되는 게 아니고, 어제 주문한 책이 들킬까봐 걱정됐다. 간밤에 남편 몰래 책 18권을 주문했는데, 그 택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해는 마시길. 죄다 중고책이어서 18권 사는데 배송비까지 포함 총 2만 3천 원 들었다. 훗) 그러나 내가 산 게 신간이든 중고책이든 이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된다면, 분서갱유가 일어나고도 남을 판이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이틀간 나는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책 택배를 목놓아 기다렸다. 동시에 남편 퇴근 시간도 '저녁식사를 대령해놓겠다'는 명분 하에 틈틈이 체크했다. 택배 예상 도착 시간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택배는 두 상자로 나뉘어 발송됐는데, 다행히 두 개 모두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
하지만 도착했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남편에게 들키지 않고 치밀하게 숨기는 게 최종 목표이니까. 나는 책들을 이곳 저곳에,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존재인 것마냥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주로 비슷한 부류의 책들 사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 넣었다. 빛바랜 중고책이라 그런지 위화감 없이 다른 책들과 잘 어우러졌다. 단지, 양이 좀 늘어나면서 자칫하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퇴근한 남편은 모르는 눈치였다. "무슨 이런 오래된 책을 읽고 있어?"라는 간담 서늘한 한 마디를 투척하고 지나가긴 했지만, 미션 성공이었다.
사실 나의 은닉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전자책을 읽는 남편에게, 나는 늘 종이책 폭탄 사태를 일으키는 요주의 인물이어서, 남편의 눈을 피해 책을 사수하려면 은닉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남편이 직접 큰 종이 상자 3개를 가져오고선, 그 안에 책들을 몽땅 집어넣은 적도 있었다. 선전 포고도 않은 적군의 선제 공격에 난 버럭 화를 냈지만, 결국 남편의 천사 행세 전략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생기는 도서관에다 우리 안 읽는 것 좀 기부하려는 거야. 그 도서관이 기부해달라고 공지도 띄웠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봐. 우리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숨기고, 적발 당해서 내쳐지고, 또 숨기기를 반복하던 난 어제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읽다가 예상치 못하게 중대한 대목을 만났다. 책장 정리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 만든 대목이었다.
"내 서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한 부분은 읽은 소설, 또 한 부분은 읽은 비소설, 나머지는 읽지 않은 책들이다. 읽은 책들은 내가 보기에 좋은 순서대로 꽂는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책이 맨 앞에 있고, 뒤를 이어서 그 다음 좋은 순서대로 책들이 쭉 꽂힌다. 물론 판단은 주관적이다. 그렇게 해서 평생에 걸쳐서 소설 365권과 비소설 365권을 선정한 뒤 일흔살이 지나면 매일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비소설을 읽으면서 지내고 싶다. 그러니 내 노후대책이라면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730권의 책을 마련하는 것이랄까."
아니. 이런 멋진 노후대책이라니. 그것도 지겨운 책장 정리를 재밌게 해가면서 준비할 수 있는 노후대책이라니. 신박한 발상이었다. 원래 내 책장의 정리 기준은 '분야별'로 묶어서 보관하는 것이었는데 (카오스에도 나름 질서는 있었다), 그러다보니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이 뒤섞이고 내 선호도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 분야에 관심이 안 가면 아예 그쪽 책들에 손이 가지 않는 역효과도 생겼다.
그런데 그의 조언대로 읽은 것과 안 읽은 것, 소설과 비소설, 그리고 나의 선호도라는 세 가지의 기준으로 교차해서 정리한다면, 내가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사놓고 안 읽었는지, 그리고 당장 내다팔아도 안 아까운 책이 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책장에 꽂으면서 '이 책은 내 몇 번째 인생책이지?'하며 순위를 매기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난 책장 정리하며 재미를 느끼고, 남편은 그런 날 보며 개과천선했다고 여기고. 일석이조의 솔로몬 해법이었다.
당장 이번 주말부터 실행에 옮겨보겠노라 다짐했다. 단, 지금은 널브러진 책들이 많아 감당이 안 되므로 천천히, 마치 책으로 밸런스 게임을 한다는 마음으로 정리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조금씩 내 책의 선호도를 구분짓다보면, 지금의 책장, 그리고 앞으로의 책장 배열이 얼마나 바뀔지도 알 수 있겠지?
내침김에 매해 일정한 시점마다 사진을 찍어서 비교해봐도 좋겠다 싶었다. 어떤 해는 "1년간 읽은 책들이 이렇게나 없었어?" 라며 스스로를 타박하고, 어떤 해는 "내가 이렇게나 많이 읽다니"라며 대견해하기도 할테지. "내가 이런 책을 맨 앞에 뒀었다고?", "왜 이책이 맨 뒤에 있어?" 라며 과거의 형편없는 안목에 쥐구멍에 숨고 싶기도 할 것이다. 안 봐도 눈에 선한 재미들이다. 책 정리를 귀찮아 하던 내가 책 한 권 읽고 정리하고 싶어 몸이 근질 근질하다니. 역시 인생도 책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책 참고 :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학동네, 2014/11/05.
* 대문 사진 : 우리집 책장 아니고 중고 책방. 언젠가 나도 잘 정리된 책장 사진을 공유하는 게 소소한 꿈이다. 이뤄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