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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삼 Feb 22. 2023

모르는 여자의 울분을 듣다

낙타의 일기

 텅 빈 사무실의 적막을  건, 새벽 3시의 전화 한 통이었다. 제보 전화만 받는 담당자 분이 없던 2014년의 어느 날, 당직 기자였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ooo (언론사 이름)입니다." 음... 답변이 없. 장난 전화인가? "여보세요. ooo 입니다."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저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카랑카랑한 30~40대 여성의 목소리. "저기요. 거기 기자들은 불난 것 빼고는 기사 쓸 게 없나요?"

 

 생면부지의 그녀가 다짜고짜 물은 건 화재 빼고 기삿감이 없냐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언론사가 화재 기사만 썼을리는 만무했다. 화재 말고도 널린 게 기삿거리였으니까. 그런데도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한 건, 둘 중 하나였다. 특정 기사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보도의 비율을 문제 삼으려 것이거나. 어쨌 평온하길 바랐던 밤샘 근무가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분명다. 나는 졸린 낙타처럼 눈을 껌뻑이면서,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우선 알아보려 다.  


 "선생님, 혹시 어떤 기사에 문제가 있어서 연락을 주신 걸까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찾아서 살펴보겠습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호령처럼 튀어나온 목소리. "아니, 불났다는 기사가 하나 뿐인가요? 전부 다 문제잖아요. 전부 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긴가. "음...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지금 화재 기사들이 전부 다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왜 쓰냐고 묻잖아요. 불 난 기사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왜 자꾸 쓰는 거냐고요. 왜!"


 대화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들었다. 특정 기사를 잘못 썼으니 고치라는 지적도, 다른 사건 사고보다 화재 기사를 유독 많이 쓰고 있다는 문제 제기도 아니었다. 그저 화재 기사를 왜 쓰느냐는 실존적인 질문, 그 자체였다.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당신, 왜 환자를 진찰해주고 있냐고요, 왜!"라고 묻는 모습과 비슷했다. 물론 물으려면 얼마든지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단지 내 입장에서는 새벽 3시에 당직을 서고 있던, 화재 기사와는 무관한 부서의 기자에게 질문했다는 게  야속했을 뿐. 뭐, 근데 어쩌겠는가. 그녀 입장에선 사회부 기자든 정치부 기자든 그 기자가 그 기자일 것이고 (혹은 그 기레기가 그 기레기일 것이고) 어쩌면 새벽 3시가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시간일지도 모를 일인 것을.  

 

 "선생님. 죄송하지만, 화재 기사가 전부 다 문제라는 말씀을 이해를 못했는데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여전히 눈을 껌뻑이면서, 졸린 낙타처럼 말했다. 실제로 졸리기도 했고 이해를 못하기도 했지만, 새벽에 목이 잠기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뜨문뜨문 낙타의 걸음 속도로 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 얘기는요..." 본인과는 정반대인 느릿느릿한 내 목소리가 답답해선지, 수화기 너머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헉. 흐느끼다니.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그녀가 민망해할까봐 마치 종종 겪는 일인  의연하게 굴었. "괜찮습니다, 선생님. 천천히 말씀해주세요."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은 소방관이었다. 그것도 늘 현장 최일선에서 화재 진압을 맡는 소방관. 일주일에도 2~3일씩 늦은 밤에 집에 들어와, 몇 마디 대화하지도 못한 채 다음 날 출근하는 일상을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고된 업무도 업무지만, 그녀의 지쳐가는 몸과 마음도 문제였다. 전업주부인 그녀는 하루 24시간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 바위처럼 무거운 일상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억척같이, 자신이 힘들다는 내색을 남편에게 비치지 않았다. 매일 녹초가 되어 쓰러지는 남편의 어깨에 또 하나의 돌덩이를 올려놓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만큼은 남편에게 힘이 되는 존재이길 바랐다면서.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점점 더 그녀를 좀먹게 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야속하다생각했다. '아무리 일이 좋아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힘든 일만 골라서 하는 건지. 아이와 나는 내팽개쳐도 된다고 생각하?' 그러다가도 남들 다 자는 새벽에 터덜터덜 힘 없이 들어오는 남편을 보면, 너무나 안쓰러웠단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미안했고 때론 죄책감까지 들었. 그래서 그녀는 야속한 대상을 남편을 둘러싼 세상으로 넓혔다. '왜 저 사람은 가스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우리 남편을 힘들게 했을까', '남편네 회사는 왜 이렇게 남편만 고생시키나,' '세상에 불 지르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민폐를 끼치나.' 이렇게 야속한 대상을 조금씩 확장하다보니, 이젠 화재 기사까지 볼모로 삼게 됐던 것이었다. '기자들이 화재 기사를 자꾸 쓰니까, 남편이 불을 안 끌 수가 없는 상황이 반복되네. 화재 기사만 없다면, 남편이 편히 쉴 수 있을텐데...'


 흐느낌과 울먹임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이야기는 1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이야기도, 울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잠자코 듣던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결국엔 싱겁고 식상한 답변으로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사실 보도 요청을 전제로 하지 않은, 울음 반 흐느낌 반의 '통곡 전화'를 받는다는 건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보 전화는 보도를 요청하는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육하원칙에 따라 큰 틀의 사건 사고 개요를 남긴 후 추후 담당 기자가 배정되면 그 때 가서 더욱 상세히 설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다그치듯 시작된 전화를 내가 적절히 둘러대며 끊지 않고 1시간 넘게 이어간 것도 나의 전적을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전화를 받기 불과 몇 주 전, "내일 지구가 종말하는데, 기자회견 장소를 어디로 하면 좋겠느냐"는 60대 여성의 전화를 받은 적 있었다. 당시 나는 5분도 채 안 돼 그 통화를 마무리 지었는데, 그 때의 답변은 이러했다. "선생님, 내일 지구가 종말하면 기자들이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기사를 써야 할 텐데요. 이미 지금이 밤 시간대여서, 오늘 기자회견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분도 자신이 늦게 연락한 사실을 못내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던 그녀의 전화를 내가 1시간 넘게 붙들고 있었던 건, 이상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날 새벽 특기할 만한 다른 사건 사고가 없어 약간의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호통치듯 시작된 그녀의 날선 목소리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어떤 간절함꼈다. 기자에게 왜 기사를 쓰느냐는 문은 지극히 실존적물음인데 오죽했으면 이 새벽에 그 문제로 언론사에 전화를 걸을까 도 했고, 실제 들어보니 진짜 오죽한 상황이 맞기도 했다. 당시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그저 남 얘처럼 들리 않았다.  역시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걱정할 가족들이 더 걱정돼서 혼자 속으로만 삭였던 순간들이 꽤 많았으니까.


 그러나 나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아픔을 위로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독박 육아를 몇년째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배우자에게 나의 힘듦을 토로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많이 힘들겠다는 느낌만 막연하게 가져볼 뿐. 어떤 말이 그녀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한 것이라고는, 역시나 졸린 낙타처럼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였다. 중간 중간에 이야기한 짧은 답변도, 위로라기 보다는 솔직한 나의 단상에 가까웠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힘내시라는 말씀도 감히 못 드리겠어요." 그녀에게는 그저 싱거운 추임새들에 불과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웃으면서 내게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얘기를 꺼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너무 시원하다고 했다.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진작 용기를 내볼 걸 그랬다며, 처음에 몰아세우듯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당신도 우리 남편처럼 이 새벽에 고생하며 근무하고 있는 걸텐데 방해해서 또 미안하다고 했다. 연신 미안하다, 고맙다, 속이 시원하다. 이 세 가지 말을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아니에요. 듣기만 했을 뿐인 데요. 그럼 편히 쉬세요." 그렇게 긴긴 통화를 마치며 그녀를 일상으로 돌려보낸 후 나도 현실로 돌아왔다. 적막한 사무실, 새벽 4시 30분이었다. 1시간 30분간의 통화를 기점으로 바뀐 것은 목이 좀 더 마르고 배가 출출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그저 언어 영역의 점수하나의 단계로서만 효용성을 느끼곤 했던 '듣는 행위' 재발견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느릿느릿 낙타의 속도로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될 수 있단 걸 처음 알게 됐다. 스스로도 졸린 낙타처럼 보였던 그 수동적이고 정적인 행위가 실은 발화자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한,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필요로 했던 것ㅡ위로ㅡ을 줄 수 있는, 매우 능동적이고 동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도 하나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역행자가 되었다(?).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추앙받는 시대를 살면서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주목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는 세상일 수록, 경계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 세상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중앙만을 바라보며 달려갈 때, 누군가는 가장자리에 놓인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할 테니까. 또 한 가지 다른 이유는,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이야기했듯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인간을 향해 던져진 자연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나 주인공이지, 당신의 인생에서는 배경에 불과하다. 그러니 어차피 당신 인생에 배경으로 등장한다면, 이왕이면 좀 친절하고 멋진 배경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간질간질할 때 언제든 하품하며 나타날 수 있는 졸린 낙타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당신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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