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남태평양 마셜제도 체르본 (Chirubon) 섬의 일본군 부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쩍 마른 강제 동원 피해 조선인들이, 일본인 감독관에게 들키지 않으려 속닥거렸다. ooo는 일본인들을 따라 나섰다가 며칠째 행방이 묘연한 조선인 동료였다. 조선인들은 아무래도 ooo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며, 몰래 몇 명씩 조를 짜서 수색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조선인들은 식량을 찾으러 갔던 인근 무인도에서 시체로 널브러진 ooo를 발견했다. 그것도 허벅지 살이 포를 뜬 것처럼 도려져있는 시신을. 그래서 그들은 경악했다. 동료가 시신으로 발견된 것 자체가 충격이었지만, 며칠 전 일본인들이 자신들에게 선심 쓰듯 건넸던 고래 고기가 동료의 인육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들이 있던 섬은 밀리 환초(環礁 , 산호초 섬이 띠 모양으로 연결된 곳)라는 곳의 일부였는데, 이미 미군 군함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그래서 일본 본국으로부터 1년 넘게 보급이 끊겨,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풀잎으로 죽을 쒀 먹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난데없이 고래 고기라는 것을 선심 쓰듯 나눠줬으니, 이례적이고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며칠 후부터는 다른 조선인들도 실종됐다가 포가 떠진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일본인에게 잡혀 먹히나,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맨주먹으로라도 싸우자."
극한의 공포 속에 동요하던 조선인들 중 몇몇이 반격을 도모하자며 뜻을 모았다. 당시 체르본 섬 인근에는 미군 군함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만 없애고 섬을 탈출하면 미군에 투항하면서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 계획만 순조롭게 이행된다면, 미국 군함을 통해 얼마든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1945년 3월 18일 밤. 바로 그 때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감시인으로 파견된 일본인 10여 명 중 7명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튿날 소식을 듣고 투입된 일본군 토벌대에게 잔혹하게 학살 당하면서, 그토록 갈망했던 귀향의 꿈도 영영 이룰 수 없게 됐다. 항복하겠다며 두 손을 든 조선인들도 목숨을 잃은 건 마찬가지였다. 당시 숨진 사람은 무려 백여 명. 일부 조선인은 야자나무 맨 꼭대기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는데 이들의 증언으로 이 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히지 않고 공개될 수 있었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부상자 2명을 포함해 15명에 불과했다.
여기까지가, 야자수 맨꼭대기로 올라가 살아남았던 故 박종원 씨가 또다른 생존자였던 故 이인신 씨에게 전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내용입니다. 故 이인신 씨는 강제 동원 됐을 당시부터 밀리 환초를 탈출할 때까지 3년여 간의 군속생활을 기록한 123쪽 분량의 수기를 진상규명위에 전달했는데요. 그 덕분에 이 이야기도 10여 년 전 국내 언론을 통해 공개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故 박종원 씨는 조선인 180여 명 가운데 부상자 2명을 포함해 15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했지만, 이 부분은 사료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돼있긴 합니다. 가령, 미 해군은 당시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구조한 뒤 '19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군)의 노예 생활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68명의 생존자를 미 해군이 구조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제주대 사회학과 조성윤 명예교수는『남양군도의 조선인』에서, 토벌대에 의해 조선인 60여 명과 원주민 15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명만이 목숨을 건져 미군 함정으로 도망쳤다고 집계했습니다. 일본군 전범 기록에서도 이런 내용들이 확인됩니다. 마셜제도에서 복무한 히데사쿠는 전범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한국인 폭동과 이에 대한 토벌은 사실이며 인육 살해는 마셜제도 곳곳에서 있었다고 기술했습니다.
마셜제도 체르본 섬에서 미군에 구조된 조선인들. 오랜 굶주림에 앙상한 모습이지만, 드디어 섬에서 탈출한다는 기쁨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 미 해군 국립박물관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일본 본국으로부터 버림 받은 밀리 환초의 일본군들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고, 그런 그들 밑에서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들은 더욱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군들은 '나라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기아 지옥에 던져져, 죽은 전우의 살점을 먹으며 생을 연명해야 했고, 그런 그들 밑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말 그대로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탈출을 시도했다가 학살당했다는 것이지요.
이 사례 뒤에 가려진 더 끔찍한 진실은, 이 사례 하나가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 동원된 피해자 사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일제에 의해 군인·군무원·노무자로 강제 동원된 한인의 수는 무려 780만 4천 376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는 당시 남한 인구의 3분의 1로 추정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은 어떻게 진행돼왔을까요? 그리고 왜 지난달 한국 정부가 내놓은 '강제동원 배상 해법'은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걸까요? 분량이 많은 만큼 궁금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으실 수 있도록 Q and A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내용은 차후에도 틈틈이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Q.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A. 한국에서 제정된 법에 근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란, "만주사변(1931) 이후 태평양전쟁(1941~1945)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입니다. 전쟁 기간 중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제에 의해 끌려가 어떤 분야에서든 강요된 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들의 모든 피해를 뜻합니다.
Q. '강제 동원'과 '강제 징용' 중에 어떤 표현이 맞나?
A. 강제 동원, 강제 징용 등의 용어가 혼용되고 있는데요. 얼핏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제 한반도 지배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인식차가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일례로, 일본 정부와 언론은 '징용공'이라는 용어만 쓰고 있는데요.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에 근거한 '징용' 제도는 '합법적'이었으니, 강제동원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반대로, 지난 2018년 대법원은 관련 판결을 내릴 때 '강제 동원'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강점이었고, 따라서 ‘징용’의 근거법인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의 효력도 인정할 수 없으니 일제가 한반도 사람들을 데려가 일을 시킨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강제연행해서 강제노동을 시킨 것, 즉 강제동원이라고 선언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동원의 강제성은 물론, 불법성까지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강제 동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Q. 강제 동원 피해자의 수는 몇 명인가?
A. 일제에 의해 군인·군무원·노무자로 강제 동원된 한인의 수는 총 780만 4천 376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는 강제동원위원회가 2016년에 간행한 『위원회 활동 결과 보고서』에서 추산한 자료인데요. 법률이 규정한 강제 동원 피해자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는 제외한 숫자입니다.
Q. 당시 남한의 인구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강제 동원됐나?
A. 한 연구자에 따르면, 1945년 남한의 인구가 2천500만 명으로 집계되는데요. 이를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당시 총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강제 동원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Q. 한국 정부의 대응은?
한국 정부는 당초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면서 한일 양 국가 간에는 강제 동원 피해에 대한 보상 문제가 일단락된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런 다음,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국내적으로 한국 정부 차원에서 따로 실시했습니다. 1975년~1977년간 미수금을 포함한 강제 동원 재산 피해와 사망자에 대한 보상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보상에 대한 비판 여론과 민원 제기가 계속 이어지자, 한국 정부는 2004년 특별법을 새로 지정하고, 이 법에 따라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한 후 피해실태와 진상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는 1975년~1977년의 보상이 불충분했다는 전제하에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Q. 1975년~1977년 당시 보상이 어땠길래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왔나?
A. 당시 강제 동원으로 사망한 피해자 유족들에게는 1인당 30만 원씩 지원돼 총 25억여 원이 집행됐고, 재산 손해를 입은 피해자의 유족과 생존자에게는 9만 원씩 지원돼 총 66억여 원이 집행됐습니다. 이는 차후 새로운 법률에 근거해 2008년~2015년도 추가로 지원금을 집행한 것보다 훨씬 적은 액수였습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받고 전후 보상문제를 마무리 지은 걸 생각해보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무상으로 받은 3억 달러의 10%도 채 되지 않습니다.
Q. 한국 정부는 청구권 협정 체결로도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인가?
A.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렇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일본과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지만, 피해자 개개인이 소송을 제기할 권리는 그대로 살아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은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 동원 피해 배상 판결이 나온 후에도 재확인됐습니다.
Q. 이후 피해자에 대한 추가 지원은 어떻게 이뤄졌나?
A. 한국에선 관련 법률에 따라 여러 위원회가 생겨났다가, 2010년도 '강제동원위원회'라는 이름의 위원회 하나로 통합됐는데요. 이 위원회가 조사와 지원을 직접 수행했습니다. (정확한 위원회 명칭은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75년~1977년 집행된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후 이뤄진 추가 지원은 다시 이 위원회가 신고를 접수하고 그 중 피해자로 판정된 경우에만 국한해서 이뤄졌습니다. 피해자로 공식 인정이 된 이들에 한해서 2008년~2014년까지 위로금 지급에 관한 신청을 받았고요. 총 신청자의 약 64%인 7만2천여 건에 대해서 지급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사망 또는 행방불명된 피해자 유족에 대해서는 1인당 2천만 원, 장해를 입은 경우에는 1인당 2천만 원 이하 범위에서 장해 정도에 따라 위로금을 지급했고, 의료지원금과 미수금 등도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2015년 말까지 지급된 금액은 총 6천184억 3천만 원입니다.
Q. 일본 정부의 입장은?
A. 여타 다른 과거사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입니다. 일본 정부는 1965년도부터 지금까지 이 입장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한국인도 일본인으로서 징용된 것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이는 합법적인 식민 통치하에서 전쟁 수행을 위해 이뤄진 강제 동원은 모두 적법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Q. 이 문제가 2018년에 갑자기 다시 불거진 이유는?
A. 2018년 당시 대법원은 한일 외교사에 큰 파장을 낳는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그해 10월과 11월, 3차례에 걸쳐서 일본 피고 기업(가해 기업)이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게 직접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는데요. 대법원의 판단의 핵심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과 배치되는 판결을 내린 것이어서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 3건의 판결들의 내용을 간략히, 각 판결 내용대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이춘식, 여운택, 신천수, 김규수 할아버지 등 강제 동원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재판부는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전제로 내려진 일본 법원의 판결은 우리 헌법 가치에 반하므로, 국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소멸시효가 완성돼 배상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신일철주금의 주장에 대해선 "소멸시효 주장은 신의성실 원칙을 위반한 권리남용"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초 여운택, 신천수 할아버지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일본에 제기했지만, 일본 법원(오사카지방재판소)이 원고 패소로 판결했고 2003년에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이 판단을 그대로 확정했습니다. 일본 측은 과거 일본제철의 채무를 현재의 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에 여운택, 신천수 할아버지는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 모두 "일본의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습니다.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적 없는 이춘식, 김규수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구 일본제철은 신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다르고 채무를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2년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그 뒤 사건을 다시 심리한 서울고법은 2013년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고, 그로부터 5년 뒤인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이 판결을 그대로 확정하게 됐습니다.
(2) 대법원은 2018년 11월 29일 양금덕, 김성주, 박해옥, 이동련, 김중곤 할머니 등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이 피해자들에게 1억 원~1억 5천만 원씩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이 분들은 1944년 5월 일본인 교장의 회유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돼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중노동을 했는데요. 1999년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가 2008년 패소한 후 2012년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고, 당시 1·2심은 "일본 정부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동원 정책에 편승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로 13~14세 소녀들을 군수공장에 배치, 열악한 환경 속에 위험한 업무를 하게 한 것은 반인도적 불법행위"라며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3) 대법원은 2018년 11월 29일 정창희, 이병목, 정상화, 이근목, 박창환 할아버지 등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은 피해자들에게 8천만 원씩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이 분들은 1944년 9∼10월 강제징용돼 일본 히로시마 구(舊)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서 일했는데요. 1·2심에서 "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며 패소했다가, 2012년 5월 대법원이 "청구권이 소멸 시효의 완성으로 소멸했다는 피고들 주장은 신의 성실의 원칙에 반해 허용되지 않는다"며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하면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판단을 2심으로부터 다시 받게 됐습니다.
Q. 2018년 대법원 판결의 핵심 내용은?
A. 앞서도 언급했듯이, 대법원 판결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한국 법원이 일제 강점(식민 지배)을 불법으로 명시했다는 것, 그리고 불법적인 식민 지배하에서 이뤄진 강제 동원과 강제 노동을 불법 행위로 규정했으며, 이런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것 (즉,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직접 가해 기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고, 이 권리 실현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가로막지는 못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법원에서 일본 기업을 피고로 하는 국제재판관할권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즉,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입장에서는, 1965년 박정희 정권때 한일 양국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보상이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틀렸다는 걸 대법원의 판단을 통해 재확인한 셈이었습니다.
Q. 대법원 판결 이후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대응은?
A.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한국 정부는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반면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 판결이 한일 간에 모든 청구권이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청구권 협정 내용에 위배되는 것으로,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측에 중재위원회를 구성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지요. 이 요구는, 협정의 해석과 실시와 관련해서 분쟁이 생기면 중재로 해결한다는 1965년 청구권 협정 3조에 담긴 내용이었는데요. 한국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일본 정부의 보복성 대응이 시작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2019년 7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3개 핵심 소재 (불화수소,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고, 8월 수출우대국(별도의 수출 제한이 없는 백색국가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했습니다. 그리고는 "수출 제한 물자가 한국을 거쳐 북한 화학무기와 독가스 개발에 전용될 수 있으므로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에 한국 정부도 8월 일본을 '전략물자 수출 지역의 원칙 허용'에서 '예외적 허용'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일본의 보복성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습니다. 또 8월에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연장 없이 종료한다는 의사도 일본에 전달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직접 군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정보 채널을 끝내겠다며 맞불을 놓은 것이었죠. 그 뒤 미국이 중재에 나서면서 한국 정부는 11월 파국을 조건부로 유예하는, "한일 합의에 따라 종료 통보의 효력을 중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그렇게 한일 양국간의 극단적 대립은 한동안 계속돼왔습니다.
Q. 양국간 갈등 와중에 지난 달 한국 정부가 꺼내든 '강제동원 해법'은 무엇인가?
A. 한국 정부가 꺼내든 '강제동원 해법'은 국내 기업의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는 '제3자 변제'입니다. 패소 당사자인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대신 한일 재계의 기부로 기금을 조성해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는 해법입니다. 기금 조성은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이뤄지는데, 현재까지 포스코가 40억 원을 기탁했고, 그 외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암참), 서울대 총동창회, 재일 경제인들도 동참의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강제동원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자인 피고 기업들의 돈을 직접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 한국 기업의 기부금을 통해 간접적으로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 받게 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이 해법을 꺼내든 것은 '한국이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면 일본이 성의 있게 호응해 일본의 피고기업들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하고 적절한 사죄 표명을 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해법이었습니다. 일본이 피고기업의 돈을 내는 것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사죄 표명 역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재확인한다'는 것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무라야마 내각 등 특정 내각의 입장을 명시하지 않은 채 '역대 내각의 입장'을 재확인한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얻을 건 얻어내지 못하고, 내준 것만 많았다는 비판이 많은 상황입니다.
특히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와 이춘식 할아버지 등 3명은 제3자 변제에 반대했고 유족 2명도 반대 입장에 동참했습니다. 이들 피해자는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라는 2가지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나머지 원고 10명은 변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선회했지만, 나머지 5명의 원고와 추가로 줄줄이 예고돼있는 소송의 원고들을 정부가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강제동원 해법은 미완의 해법으로 남게 될 여지가 큽니다.
참고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지급해야 할 배상금은 1인당 2억 3천만 원에서 2억9천만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법원은 당초 일본 피고기업이 피해자에게 1인당 1억 원 안팎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일본 측이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면서 지연 이자가 붙어 금액이 더 늘어난 상태입니다.
Q. 정부가 꺼내든 게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라고 하는데, 왜 비판을 받는 건가?
A. 이 해법은 한국 정부가 추진할 수 있는 것 중에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대법원 판결을 우회하는 정치 외교적 해결이긴 하지만,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일 양국 관계를 더이상 파탄내게 하지 않으면서, 피해자들에게 판결금 등을 지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해법이 '피해자에게 판결금 등만 지급하면 해결될 사안'으로 다뤄져도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금전적인 채권·채무가 아닌, 인권침해 사실의 인정과 사과를 통한 피해자의 인간 존엄성 회복과 관련한 문제이니까요. 게다가 2018년 대법원 판결이 국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판결이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은 정당하게 피고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으니, 정부는 그들의 권리를 적극 고려해서 해법을 내놓았어야 합니다. 즉, 두 건의 대법원 판결의 원고인 15명의 피해자가 모두 지원재단에서 지급하는 배상금을 수령하도록 설득했어야 합니다. 설령 피고 기업 (가해 기업)의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한일 기업의 기부금으로 판결금을 대신 받아달라는 설득이라도 할 수 있었어야 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전제 조건들은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와 이춘식 할아버지 등 3명은 제3자 변제에 반대했고, 피해자가 숨진 후 재산권을 승계받은 유족 2명도 반대 입장에 동참했습니다. 총 15명 중에서 5명이 정부의 해법에 반대한 것입니다. 이 분들이 끝내 수령하지 않는다면, 문제 해결은 쉽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로선 최소한 법원 공탁과 같은 절차를 통해 법률적으로라도 배상 절차를 마무리하려 할테지만,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단은 정부가 공탁에 나설 경우 공탁 무효소송 등 법적 대응을 검토한다는 입장이어서 이마저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게다가 정부가 배상금 지급 대상으로 염두에 둬야 할 분들은 15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가운데 9건이 대법원에 계류돼 있고, 1·2심에 계류중인 소송은 60여 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즉, 계류중인 소송이 모두 원고(징용 피해자) 승소로 이어진다면, 약 100여 명이 제3자 변제를 통한 배상금 지급 대상이 됩니다. 이 말인 즉슨, 정부가 설득해야 할 원고가 15명에서 100여 명으로 확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제3자 변제의 주체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마련 중인 재원 (포스코 등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으로는 부족한 만큼, 재원 마련은 물론이고 피해자 설득에도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아쉬운 점은 또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은 물론,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많은 만큼, 이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한 공론화 과정도 충분히 거쳤어야 했습니다. 추가 소송들을 정치적 외교적으로 원만하게 풀기 위해선 입법 조치가 필수인 만큼 야당과의 협력도 염두에 두면서 움직였어야 했지요. 비록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원죄'가 워낙 큰 만큼, 정부가 내딛을 수 있는 보폭의 한계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좀 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더 정교하게 해법을 추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우회적으로라도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닥치고 끌려가던 존재에서, 마땅히 물어야 할 일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존재로 복원'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 문장은, 김경미 섀도우캐비닛 대표의 글 '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 속 문장을 차용했습니다.)
※ 참고 : 유의상, 『한일 과거사 문제의 어제와 오늘 (식민 지배와 전쟁 동원에 대한 일본의 책임) 』, 동북아역사재단, 2022/12/10.
『위원회 활동 결과 보고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6.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법률 제7174호의 제2조 제1항).
박경숙,「식민지시기(1910-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한국 인구학』 32(2), 62쪽, 2009.
「외교부, '자산매각 명령' 日 반발에 '해법 마련 위해 대화 응하라'」, 『연합뉴스』, 2021/9/28.
김경미, 「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 한국일보, 2023/3/8.
「인권위원장 "3자 변제, 매우 우려스러워" "피해자 중심 국제기준에도 어긋나" 비판」 , 경향신문, 2023/3/8.
국사편찬위원회, 남양군도 밀리 환초 한국인 반란사건(1944년 3월), http://archive.history.go.kr/reference/view.do?id=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