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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닥의 생각 Apr 10. 2021

합기도를 통해 배운 '인생 호신술'

맞고 터지고, 때리고 업어치며 배운 것들


청소년 시절을 건전하게 보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못 말리는 중2병, 질풍노도의 시기에 집과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는 합기도장에 가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곳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합기도장 '검무관'이었다. 

퀴퀴한 땀냄새와 몇 번을 덧대고 꿰맨 흔적의 샌드백, 그리고 한쪽 벽면에 쭉 나열된 유단자들의 나무 명패는 매번 묘한 흥분감을 줬다. 나는 이곳에서 맞고 터지고, 때리고 업어치면서 사춘기 청소년의 에너지를 분출했다. 

합기도 체육관의 수련 프로그램은 유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다닌 곳은 이랬다. 1단의 검은띠가 되기까지는 자신을 방어하는 '호신술'을 배우고, 2단에서는 호신을 넘어 상대를 제압하는 '격기술'을 배운다. 3단으로 넘어가면 봉, 검, 쌍절곤 등 '무기술'을 배우며, 4단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모든 기술을 응용하는 '합기술' 을 수련하게 된다. 

합기도의 기본 술기 외에 발차기, 낙법, 체력훈련 등은 기본기에서 시작해 그 강도와 속도, 정확도 등을 높여 가는 것이 수련의 관건이다. 통상 입관에서 1단까지 1년, 1단에서 2단 까지 또 1년, 2단에서 3단까지 2년, 3단에서 4단 까지 3년의 시간이 걸린다. 

흰띠에서 수련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4단 '사범'이 되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이는 7년 동안 공백 없이 거의 매일 수련해야 가능한 일이다. 합기도로 먹고살거나, 체육 관련 전공을 할 것이 아니라면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경지였다. 

중학생 때부터 수련을 시작한 나는 4단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체육관을 대표해 연합회 대회에 나가거나 지역을 대표해 전국 대회에 나갈 정도로 제법 잘하는 선수였다. 

저 때의 몸은 지금의 내 살 속에 파묻혀 있다


청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10년 가까이 합기도를 수련하며 나는 인생의 중요한 '4가지 호신술'을 배웠다. 

첫째, '자신감이라는 호신술'이다. 불가피하고 불의한 일로 맞고 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런 일이 생길 때 부끄럽게 숨지 않을 용기를 배웠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때 술 취해 쓰러진 사람의 지갑을 터는 '아리랑 치기'범을 쫒아 격투 끝에 잡기도 했고, 몇 해 전에는 공원에서 가족에게 추태를 부리는 남자를 제압해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내가 겪거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피해를 당하지 않고, 방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그 자체만으로 삶의 큰 힘이 된다. 

둘째, '인생의 단계라는 호신술'이다. 3단 수련을 하면서 몸에 익지 않은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 밤늦게 까지 남아 있을 때였다. 집에 좀 가라고 핀잔하던 관장님께 이 기술이 정말 실제로 사용되는 거냐며 투정을 부렸다. 발차 기용 미트로 한대 얻어맞고 들은 그 가르침은 지금 까지 내 삶의 큰 지표가 됐다.  

"야 임마, 언제 까지 운동을 그렇게 무식하게 할 거냐? 운동은 처음에 '몸'으로 시작하지만 그다음은 '머리'로 하고, 마지막에는 '감'으로 하는 거다 이 답답한 놈아" 

그날 밤 들은 이 말은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있다. 일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때도 나는 지금 '몸'으로 할 단계인지, '머리'로 할 단계인지, 아니면 '감'으로 할 단계인지를 생각하게 됐다. 글 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무작정 엉덩이 붙이고 앉아 써야 할 단계가 있고, 논리로 틀을 잡아야 할 단계가 있고, 감각적으로 꾸미거나 표현해야 할 단계가 따로 있다. 이 단계를 거스르면 글도, 말도, 삶도, 관계도 제대로 되지가 않는다. 

셋째,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호신술'이다. 태권도, 권투, 특공무술, 합기도 등 다양한 격투기들이 모여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에서 전국대회를 할 때였다. 뒤늦게 대회를 준비한 나는 우선 서울 대표가 아닌 경기도 대표로 지역을 바꿔 나가야 했으며, 당시 내 체중인 64Kg에서 7Kg을 감량한 57Kg인 라이트급으로 출전해야만 했다. 

기한은 1주일, 하루에 1킬로씩은 빼야만 했다. 물만 먹고 버티는 것이 하루 이틀은 괜찮았지만 그 상태로 운동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성장기 청소년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대회를 포기하느냐 감량을 포기하느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감량을 선택했고, 대회 당일 화장실에서 위액까지 다 토해내고 팬티만 입고 올라간 상태에서 겨우 계체량을 통과할 수 있었다. 

16강전부터 시작한 경기에 나는 4강전까지 올랐다. 4강전에서 붙은 선수는 그냥 보기에도 '강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준비를 하면서 흔들리는 내 눈빛을 봤는지 관장님이 다가와 말했다. 

"지지 않으려면 이긴다는 생각으로 싸우지 말고 죽인다는 생각으로 싸워라, 어차피 사람 쉽게 안 죽고 쟤도 그 생각으로 올라온 거다" 

그 덕분에 나는 죽기 살기로 경기를 치렀다. 일주일간 7Kg을 감량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느낀 한계, 그리고 강한 상대가 주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이기겠다는 수준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달라붙었을 때 극복되는 한계를 경험했다. 

넷째, '룰 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호신술'이다. 4강전 경기에서 죽기 살기로 붙었던 나는 상대를 장외로 밀어붙인 후 심판의 중지 신호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결국 장내로 들어오던 상대 선수의 얼굴을 뒤 돌려차기로 제대로 가격해 그는 그대로 쓰러졌고, 나는 실격패를 당하게 됐다. 

실격당한 4위. 이것이 그 날 대회의 내 성적이었고 병원에 실려간 3위를 제외하고 1,2위만 시상대에 올랐다. 나는 시상식을 지켜보며 도저히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병원에 실려간 3위 보다 내가 강했고, 시상대에 서있는 1,2위도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룰에서 졌다. 아무리 내가 더 강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룰을 지키지 않은 선수는 경기장에 있을 수 없고, 시상대에도 오를 수 없었다. 나는 삶의 결과도 일의 성과도 정해진 룰 안에서 성취해야만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다. 




하얀 땀자국이 밴 검은 도복, 그리고 이름 석자가 박힌 검은색 띠는 이제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다. 그 도복을 입던 시절보다 몸무게는 30Kg이 더 쪘고 당시의 투지와 강인함은 늘어난 뱃살 속에 파묻혔다. 그러나 그 치열했던 합기도장에서 얻은 4가지 배움은 지금의 삶을 이어온, 또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밑거름이 되었다. 

왜만 해선 맞고 다닐 일은 없다는 '자신감', 몸으로 할 때와 머리로 할 때와 감으로 할 때가 있다는 '삶의 단계', 그리고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과, '룰 안에서의 승리'라는 사실까지, 

합기도를 통해 배운 이 4가지 '인생 호신술'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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