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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닥의 생각 Mar 14. 2021

나는 홈짐을 만들 것이다.

아재의 알싸한 설렘과 낭만을 위하여


잠들기 전 상상만으로도 아랫배가 알싸 해지며 베개를 뒤척이게 하는 생각들이 있다.

유치원 시절 12월 24일 밤 잠들기 전이 그랬고, 초등학교 때는 소풍 가기 전 날이 그랬다. 좀 크고 난 뒤에는 비행기를 타고 긴 여행을 가기 전이 그랬으며, 첫 차를 사기 전 며칠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고 아랫배가 알싸한 설렘. 밤잠을 뒤척이며 혼자만의 망상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고 또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요 몇 주 이 알싸함에 다시 밤잠을 뒤척이고 있다.


나는 홈짐을 만들 것이다.


몸짱이 되어 바디 프로필을 찍거나 3대 500을 완수하겠다는 욕심은 아니다(이미 3대 485까지는 했다). 그냥 혼자서 좋아하는 것을 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코로나 이후 마음 편히 여행도 못 가는 상황과 그나마의 탈출구인 운동도 마스크를 쓰고 헐떡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홈짐은 아니다. 애지중지 하던 서재는 딸아이 놀이방으로 빼앗긴 지 오래이고, 집안에 살림이 늘어가는 것은 더 이상 용납이 안된다.

내가 찾은 탈출구는 집 가까운 곳에 창고 같은 방이라도 사글세로 마련해 운동기구를 집어넣고 나 혼자만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계획의 첫 단계는 와이프를 설득하는 것이다. 어쨌든 수백만 원을 깨질 일이었기 때문에 1단계의 완수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어찌어찌 반승낙은 받아냈다.

다음은 공간을 찾는 일이다. 동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5평 이상, 10평 미만! 지하도 좋고 창고도 좋고 옥탑도 좋지만 환기가 잘 되어야 함! 보즘금 없이 사글세, 대신 일시불 현금! 계약서 명시!"의 조건을 붙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공간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곳을 추천받아 가보았지만 공간이 괜찮으면 환기가 안됐고, 환기가 잘 되면 마치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난관이었다. 하지만 실망보다는 오기가 더 생겼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에 들고 가격에 맞는 공간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강해졌다.

부동산 몇 곳에 더 부탁을 해두고 세 번째 단계인 운동기구를 알아봤다. 장기화된 코로나로 헬스 업계의 중고 매물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헬스장용 기구와 홈짐용 기구는 달랐고, 홈짐용 운동기구들은 코로나 특수로 가격도 올랐지만 제작되어 출고되는 데에만 몇 달이 걸린다고 한다.

갈수록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프랙, 멀티랙, 파워랙, 이동식 스쿼트랙 등 홈짐의 기본 구성인 랙의 종류부터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시 찾아봤고, 종류별 원판과 중량봉의 장단점, 온습도에 따른 기구의 관리 등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 것들을 알아보고 었다.




쓰고 보니 마치 운전할 차도 없는데 혼자서 정비를 공부하고, 드라이브 다닐 망상을 하는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아 민망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랫배 알싸한 설렘과 아재의 낭만이 싫지만은 않다.


이러다 적당한 곳을 찾았다는 부동산의 전화 한 통에 기쁨과 함께 현금 지출의 압박감도 느끼겠지만 그래도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에 욕심을 한번 내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홈짐을 만들 것이다.

코로나 이전. 마스크 쓰고 운동하기 전. 90kg 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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