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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바토레 Oct 14. 2021

■ 작별하지 않는다.

□ 제주 4·3 사건과 서북청년단.

■ 머리말


소설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란 신작 소설이 출간되었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 켜켜이 눌러놓았 고통의 흔적들이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화자를 통해 전개되어 가는 이야기다.


이 소설과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하고 있는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가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과 지주 계급에 대한 탄압으로 핍박받던 박훈의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라면 이 소설은 이후 북한의 개혁에 반발해 월남한 박훈과 같은 지주 세력서북 출신 기독교 청년 단체 등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약칭 서청)과 같은 이들이, 공산당에 대한 복수심과 당시 남한에 단독으로 반공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던 미군정을 비롯해 권력 찬탈과 정권유지에 혈안이 된 이승만 정권과 이해관계맞아떨어져서 벌인, 잔혹한 민족 학살극인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아직도 그때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5.18에 관한 소설을 쓰고 그 트라우마로 매일 밤 악몽을 꾸며 힘들어하던 경하와 친구 인선이 사고로 다시 만나면서 인선이 어릴 적 겪었던 4.3 사건의 기억사건으로 오빠를 잃어버린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불행했던 과거가 눈보라 속에 고립된 외딴집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며 경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참혹했던 기억들은 작가의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감정선과 시적인 문장을 통해 분해되고 다시 조립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작가는 그 속에서 시대를 공감하며 같이 아파하며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과 공존하며 살아갈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게 되고, 그것이 바로 죽은 이들에게서 남은 자들로 이어지는'지극한 사랑'이라 걸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명명한 것은 단순히 제주 4.3 사건 이란 불행한 과거사에 기인한 역사의 암울한 단면과 그 속에서 고통받아 온 정심과 같은 이들의 비극적인 삶을 모습을 재현하여 그것이 보여주는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과 이기심, 욕망 등 인간 존재의 본성표출하고 구현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잊지 말아 달라는, 그래서 기억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아가 그 간절한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4.3을 마주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살아가야 할 우리자세자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것을,  소설이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였음 한다는 작가의 말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충분히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작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 p328~329
▲ 한강은 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길 빈다라고 한다 이미지 출처: yes24 / 사진 편집: 트로바토레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제주 4.3 사건'처럼 인간의 역사는 투쟁과 정쟁(政爭)반복이다. 그것은 대상과 주체만 바뀔 뿐 어느 국가나 '혁명'이나 '항쟁' 따위의 이름으로 역사의 전환기 때마다 있어 왔다. 그건 당연한 시대의 변천사였고 그 속에서 도태 약자들의 최소한의 외침이자 궐기였으며, 어느 시대나 있어 온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과정이 인간의 권력ㆍ지배욕, 생존 욕구 등기인한 역사의 당연한 흐름이라고 지라도 이민족도 아닌 동족끼리의 살상, 게다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잔인함, 이를테면 생살을 찢는 고문과 성폭행, 근친끼리 강제 성교를 시키거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산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바다에 수장시키는 등의 행위는 그 이면에 도사린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 권력에 대한 집착, 이기심과 질투로 인한 배신, 증오, 살상 등등 까지도 모두 부조리한 인간 본성이라고 치부하고 그 모두를 온전히 우리 역사의 일부로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그 과정과 결과가 너무나 패륜적이며 비인간적인 잔인범죄로, 그것도 무려 7여 년 간에 걸쳐 벌어진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럼  비극은 온전히 피해 당사자나 그 유가족만의  전유물이나 고통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제주 4.3 사건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우리 부모나 선조들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서 벌어진 일이며, 그런 지난한 과정과 수많은 역경을 통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책임이고 숙명다.

한강 또한 이 소설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짊어지고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고 가야  고통이자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길로,  자체로 죽어간 이와 남은 자들을 잇는 지극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 4.3 사건(4.3 사건 혹은 4.3)사전적 정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ㆍ 단일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p536.). 

제주 4.3 사건의 전면에 등장하는 핵심 단체가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서청이다.


이 글에서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제주 4.3 사건의 발생 경위와 주요 기록들과 전개 과정, 결과 등 살펴보  사건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영향력을 분석하여  비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마음가짐  사건 대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지극한 사랑)대해 생각보려 한다.

더불어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없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한강이 그녀의 자전적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제주 4.3 사건의 전개


사건의 배경

: 서청의 탄생과 제주도 투입


해방 이후 북한의 친일파 숙청과 지주계급 탄압을 피해 1947년까지 북한 인구의 10%에 이르는 100여만 명이 월남했다. 이들은 주로 북한 체제 특히,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토지개혁에서 직ㆍ간접으로 피해를 당했거나 반발한 지주세력이나 우익인사들 반공·반북적 이념이 강한 이들이었다. 여기에는 북한의 토지개혁에 찬성했던 좌익인사들학살한 교회 청년단이나 젊은 지도자 등으로 구성된 유격대나 치안대 출신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평안도ᆞ황해도 출신들이 이승만 정권과 미 군정을 등에 업고 친미ㆍ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만든 단체가 바로 '서북청년단' 즉, 서청이었다. 

 단체는 후에 제주 4·3 사건의 원인이자 학살과 탄압의 주역이 된. 즉, 서청의 배후에는 정부와 군정 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등 위원회(2003)등을 통해 모두 밝혀진 사실이다.


1948년 미 군정서는 '이승만은 12월 10일 서북청년단 총회에 참석해 "제주도 4·3 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 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기록하고 있다.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 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소요가 발생한 이 지역에서 한 달 동안의 의무 근무기간이 끝나면 재배치되어 서울로 올라올 계획이다........(중략).....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에 요원으로 제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지난번 보고(<일일 정보보고> No. 1005)를 확인하고 있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12일~1948년 12월 13일 (No. 1011, 1948. 12. 13. 보고)

이승만은 사설 단체인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되었다. 단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비대·경찰복장을 하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단원들은 바로 경사나 경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 지서 주임 등을 하면서 악명이 높았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제주도에 들어왔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집권 세력은 '제주도 학살'의 최선봉에 서청을 세웠다. 그들은 소련군정과 북한 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아 월남한 지주세력과 서북 출신 기독교 청년들로, 그 트라우마에 의해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정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는 우파 민병대였다. 그들은 이후 이승만에 의해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4.3 사건을 비롯해 대구노동자 파업,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에 개입하여 20~40만 명 이상의 좌파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 4·3 당시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 여성들도 보인다. 무장대라고 하기보다는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이다. ⓒ제주 4ᆞ3 평화재단.

서청은 경찰로부터도 자금지원을 받았다. 특히 당시 치안 책임자이자 조병옥과 장택상은 서청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조병옥은 제주도에서 '4·3'이 발발하자 서청 본부에 단원들의 제주 급파를 요청한다. 그런데 미군 정보보고서에서 의하면 ‘서청의 지원 문제는 몇몇 미군 장교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사건의 발발 요인과 사회적 배경

   : 서청 단원의 제주도 파견과 갈등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이미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는 1949년 초 어느 자리에서 "서북 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 등이 되어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 폭동이 난 줄 안다"라고 말하였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 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 (중략).....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에 요원으로 제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지난번 보고(<일일 정보보고> No. 1005)를 확인하고 있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12일~1948년 12월 13일 (No. 1011, 1948. 12. 13. 보고)

이외에도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다수의 문헌과 증언이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537p >

▲ 제주도에 출동하는 경비대 대원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1948년 12월 20일 대전에서 200명으로 서청 '특별 중대'가 편성되었다. '특별 중대'는 소대 단위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토벌전을 벌였다. 군번 없이 경비대 복장을 한 특별 중대는 주로 성산포 일대에 주둔, 애매한 사람들까지도 '때려잡는 일'을 했다. 1949년 1월 13일 성산포 앞바다에서 28명의 고성리 청년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 무렵 국민학교 교사 6명도 총살됐다.  

12월 20일 서북 청년단원 200명이 비밀리에 대전에 있는 경비대에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갓 도착한 제9연대에 배속된 이들은 즉시 군복을 지급받았다.' 이들의 복무는 서북청년단 지도부와 제2 여단장 간의 은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주한 미 육군 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27일~1948년 12월 28일 (No. 1023, 1948. 12. 28. 보고)
▲ 체포된 남로당 무장대와 경찰에 압수된 무장대무기, 이 모습은 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에도 나온다. (짚신신은 무장대라니 아이러니 하지않은가?)ⓒ미국립문서기록관리원

서청 단원의 제주 파견은 ‘4.3’ 발발 이후 더욱 늘어난다. 당시 서청 단장을 지냈던 문봉제(文鳳濟)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4.3 사건이 나자마자 서청 단원 500명을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보낸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같이 서청은 제주도에 총 세 차례에 걸쳐 파견되었는데, 첫 번째는 1947년 3.1 사건  직후고, 두 번째는 1948년 4.3 사건 발생 후였다. 세 번째는 1948년 10월 평안남도 출신 경무부 공안 과장 홍순봉이 제주도로 발령받은 뒤였다. 이때 서청 회원들은 경찰과 군인 복장을 하고 나타나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이게 된다. 

서청 단원들에게 ‘제주도는 악몽의 섬’이었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이보다 더 험악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p266~267, p144) 기록하고 있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 <작별하지 않는다> p317


1948년 11월 17일 자로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청의 군 투입에 관해 구체적 계획을 수립, 같은 해 12월경부터 서청 회원으로 구성된 특별 중대가 9 연대와 교체된 2 연대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서청은 군과 경찰로 옷만 갈아입고 투입되었다. 이어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4개월간 대대적인 방화와 학살이 일어났다. 이들은 계엄령이 선포된 제주도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학살극을 벌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p304 및 한국전쟁과 기독교(윤정란) p239>

▲ 서북청년회의 회원증. 출처: 김관후의 4·3칼럼



◽백범 김구와 서청 단원 안두희


1949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포병 소위 안두희도 서북청년단 종로지부 총무과장으로 문봉재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었다.

* "북조선의 빨갱이도 김일성이도 다 우리와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 참가차 북한으로 가기 전 남긴 말 - 오소백 저 <인간 김구> 중 : https://youtu.be/Nl2zqqlBwmg (백범 김구 선생과 암살범 안두희)

1949년 김구 선생을 암살한 서북청년단 포병 소위 안두희는 놀랍게도 1996년 한 시민에 의해 죽음을 당할 때까지 살아 있었고, [미 308 방첩대 보고서]에 의하면 군에서 대위로 예편한 것으로 되어 있던 그가 1952년 중령으로 진급해 이승만을 위해 청부 폭력단을 조직하고 1952년 대선에서 이승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등 이승만이 가장 총애하는 측근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안두희는 1950년대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자로 변신해 사단장이 임하면 인사를 올 정도로 엄청난 권세를 누리며 살았다. 이것은 바로 이승만 정권의 사주에 의해 김구 선생이 사살되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이 같은 사실은 KBS에서 지난 1989년 제작한 <백범 김구 선생과 암살범 안두희>란 다큐에도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서청 배경과 유래


원래 이 단체는 한기총의 초대회장이었고 지금도 개신교의 존경받는 원로 중 한 명이자 서북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만들기도 하였던 한경직 목사가 만든 영락교회의 탈북청년단체가 모태가 단체. 이들은 전술한 와 같이 북한의 사회주의 토지개혁에 반발해 좌익세력을 학살하던 지주세력이나 치안대나 유격대 출신의 서북지역 교회 청년단으로 구성된 들이었다. 한경직 목사 또한 북한의 사회주의 개혁에 반발해 월남한 인사였다.


월남 후 한 목사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손쉽게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 용지를 성지로 불하받아 영락 교회를 만들었고 이곳이 당시 오산학교 출신이던 탈북 청년들의 집결지로 신앙의 공동체이자 반공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전투적 반공 기독교 사상으로 물든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서북청년단의 일원이 되면서 분열과 개파 나눔을 통해 이승만의 친위부대로서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 많은 역사의 현장에서 참극을 벌이는앞장서 것이다.

▲ 관덕정 광장에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십자가에 박혀 있다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中.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김병희 편저,『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이 기록을 보면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군경과 함께 제주 4·3 사건 때 제주도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핵심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998년 제주 4·3 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6월 22일 민족 선교 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제주 4.3을 외면해 온 한국 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라고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한데 기독교인들이 서청의 일원으로 중추적으로 기여한 것에 대해 양심 고백을 사실도 있다.


이 같은 당시 이북 출신 교인들의 만행과 월남 후 행적은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7)-신천박물관 참관기①(2014.9.25~10.6)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그 방문기 내용의 일부분이다.

증언을 들어보니 그들은 신천 지역 교회의 청년들이나 젊은 지도자들로서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해 ‘동키(Donkey) 부대’라는 유격대를 조직하거나 일시적인 자체 ‘치안대’를 조직해서 한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세력들을 모두 이 잡듯이 잔인하게 잡아 죽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면서 언덕에서 함께 뛰어놀거나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이좋게 놀던 친구들이나 이웃 주민들을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그들은 보복을 피해 대부분 월남해서 한국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올랐으며 특히 그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 혹은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들이 많아 한국 기독교 교계의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중에는 개신교 최대 교단의 총회장과 부총회장을 지낸 목사와 장로들도 여러 명 있었다.

나와 대화할 때 살펴본 바로는 자신들의 행위를 지금도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오히려 공개적인 대중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과거 학살 행적이 마치 전장에서의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나 한 듯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일이나 한 듯 공산당을 때려잡았다는 식의 무용담처럼 자랑을 일삼아 왔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한국교회가 온통 반공주의 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이 된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로서 반공 투사가 된 그들은 신성한 교회 강단을 반공 강연장과 본거지로 둔갑하게 만들거나 자신들이 속한 교파와 교단에서는 절대적으로 친미를 주장하는 동시에 반공주의를 신봉하여 왔던 것이다. 아무리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보복성 살인이라 해도 그렇게 많은 숫자를 살해하고도 털끝만큼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무수히 절망했었다.


또한 5년간이나 이 서북 청년단에 대해 조사해 왔던 케임브리지대 윤정란 교수는 그의 '한국 전쟁과 기독교'란 책에서 당시 한경직은 남한 개신교 장로회에서 신사 참배 거부 세력과 조선신학원 그룹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았는데 그 힘은 미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군수물자와 선교자금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월남한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에 독점하고 있는 선교사회를  통해 남한 기독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한경직은 북장로교 선교부와 교섭해 교회 설립 기금 10만 달러, 학교 설립비 5만 달러 등 총 1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그 외에도 장로회신학교 복구비 4만 달러 등 총 19만 달러를 지원받아.. 1949년 10월 경에는 서울ㆍ경기 지역에서만 총 44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장로회를 주도하게 된다... 여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이북 신도 대표회의였다... 이북 신도 대표회는 1952년부터는 전국적인 조직이 되었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장로회 총회에서 거의 40% 정도의 권력 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의 남한 교회 편입이 완료되자, 1953년 총회에서 이북 신도 대표회 소속인 명신홍과 한경직이 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장로교를 장악했다.
/ 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 2021) p108~112

이처럼 서북 출신이던 한경직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국 북 장로 선교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총합되어 당시 권력 찬탈과 정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승만 정권과 의기투합하게 되 1946년 11월 30일 결성된 서청이 이어 군과 경찰로 파견ㆍ배속되어 이승만의 친위부대로 동족에 대한 학살과 만행이란 결과로 나타났다고 윤정란 교수는 그의 책에서 증하고 있다.

▲4.3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시체들이 방치된 채 이를 지켜보고 있는 민간인들. <출처: 위키피디.>



서청만행, 증언들


당시 4ᆞ3 사건의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서청의 손가락 하나에 생과 사가 갈렸다고 한다. 물론 여기엔 서청을 제하고도 당시 이승만맹목적으로 충성하던 제주 경찰과 그 수뇌인 조병옥, 송요찬 등을 비롯 그를 조정하던 미군정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에 경찰이란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을 정도니 그 만행이 어땠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많은 사례들을 한정된 지면에 옮기기는 물리적으로 어려운 바 몇 가지 사례만 들면, 4.3 사건 당시 서귀포시 정방 폭포에서 토벌대에 의해 송군옥이란 이름의 남편을 잃은 여성이 있었는데 토벌대는 남편이 죽고 몇 달 뒤에서야 시신 수습을 허용했다. 시신 수습이 허락되자 부인은 폭포로 달려갔는데 수많은 시신이 거기 있었지만 사망한 지 몇 개월이 지나 거의 다 부패된 상태여서 누가 누군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눈물이 펑펑 흘러나왔지만 그녀는 남편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수많은 시신을 일일이 맨손으로 만지며 확인했다. 그러다가 눈물이 앞을 가리면 손으로 눈을 훔쳤다. 그때 시독(屍毒)로 인해서 그녀는 영영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 뒤 그녀는 죽을 때까지 40여 년을 장님으로 살아야만 했다.

▲ 4.3 사건으로 희생된 시체 속에서 갓난 아이를 업은 여인이 남편을 찾고 있는 듯 하다. <출처: 구글 관련 자료 검색 >


또한 당시 토벌대였던 서청 단원들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뺨 때리기를 강요했는데 세게 때리지 않으면 달려들어 죽도록 팼다고 한다. 돈을 모아 가든가, 소를 끌고 가야 그 짓이 끝났다고 한다.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거리는 등 이들은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백색테러를 자행하였다.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하였는데 이때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 귀순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제주항 부근의 주정공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토벌대 서청은 이처럼 '반공을 전매특허로 하는 백색 테러단 극우'였다.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지칭했고, 김재능(金在能) 서청 제주도지부장은 제주도를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빨갱이라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장모와 사위가 성교하게 한 다음 살해했다고 하니, 그들의 이 같은 만행으로 당시 제주도민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고 한다.

서청의 이 같은 학살과 만행은 1948년 4.3 발발 이전인 1947년 3.1 사건 직후부터 1954년 한라산의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무려 7여 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특공대였던 '고치돈'이란 사람은 자신이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내가 외도 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271>


▲보도연맹 사건 당시 무고한 양민들을 끌고와 구덩이에 파묻고 학살하는 자료 사진 <출처: 미국이 기밀 해제한 문서, by 미군 애버트 소령>

또한 4.3 사건 당시 학생이었던 1940년 애월읍 태생인 '장정훈(張禎薰)씨'는 애월 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총살을 목격한 경험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학살은 이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했었고, 옛날 장터에서도 했었어요. 총으로 쏘면은 금방 죽지 않고, 요런 듸 맞고.... 그러면 철창으로 찌르고 그랬죠. 장터에, 옛날 묵은 장터 있었는데, 글로(그쪽으로) 달아나다가 (사람들을) 대창으로 찌르던, 그런 기억이 나요. 젤 무서웠던 건 그 모가지 전봇대에 단 거,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그때 하나 둘 잡아오면 좀 높은데 달아 놓았어요. 지서 정문에.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죠. 한번 달면 며칠 달아 두는 거죠.
/ <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한울> p110

이후 서청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대구노동자 파업,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에 개입하여 20~40만 명 이상의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그 잔혹하고 끔찍했던 실상은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을 데려다 물고문과 생살을 찢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던 친일파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하물며 같은 민족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슬프고 잔인한 역사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1950년 6월 대전 근교에서 시체속에 엎드린채 뒤를 두려움에 차서 돌아다보고 있는 보도연맹원(어린 아이)의 모습. <출처: 위키피디.>


제주 4.3 평화 재단( http://jeju43peace.or.kr )과 위 증언에 언급된 구술증언 자료집(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한울)등을 보면 당시 생존자들의 수많은 증언과 그 참혹했던  실상들여다볼 수 있다.




4.3 사건의 경과, 주요 사건들


◽미군정의 강경대응과 평화협상


미군정청은 4·3 사건이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라남도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 비상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또 서청 단원들도 증원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 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 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말 9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4월 말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하지 사령관은 4월 27일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 중령을 제주에 보내어 사태 진압을 위해 귀순 공작과 무력 진압의 두 가지 방법을 함께 고려했다. 제주에서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슈 중령의 4월 29일 자 보고서에서 제주도 상황에 대해 “미 59 군정 중대장이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현재의 주둔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충분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라고 평가했다.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 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하였고, 결국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은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에는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하였다. 미군이 이 불타는 마을을 촬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영상 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 1948년 5월1일 불타는 제주도 오라니 마을의 모습(출처: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강경 진압을 주장한 조병옥 경무부장과 선무 귀순공작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김익렬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다음날 9 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그때부터 강경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장대는 5·10 단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하였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미군정은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선거를 치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결국 재선거는 무기 연기되었다.

5·10 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미군정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경비대 병력은 기존 9 연대 1개 대대와 부산 5 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새로이 11 연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모두 3개 대대로 강화되었다. 박진경은 11 연대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조병옥 경무부장도 담화를 발표하여 ‘강경 진압 방침’을 분명히 하고, 경찰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한편 서청 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경비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 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초토화 작전과 그 피해


1948년 당시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지시했다. 이 지시는 '초토화 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ㆍ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 지역에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미 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 9 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 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마을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고 적고 있다. 1948년 10월 당시 9 연대 군수 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는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하였다.

불꽃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연기가 솟아 닿는 구름의 흰빛이 보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 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로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代殺한 거야.

/ <작별하지 않는다> p218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 연대장 송요찬에 의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고, 이어 4·3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이승만에 의해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되었다. 즉, 제주도의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간주, 이 범위에 포함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소개(疏開)시키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거주자에게 통행금지를 포고하면서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강경 진압 작전이었다. 

▲ 1948년 정부의 계엄령과 이승만의 4.3사건관련 국무회의 강경 발언, 같은해10월17일 9연대장 송요찬의 포고령(조선일보 1948년 10월20일 기사)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해변 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혹은 채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집단적으로 희생을 당했다. 이때 집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진 주민들 중 상당수가 두려움 속에서 해변 마을로 내려가지 못한 채 산간 지역에 은신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이 작전으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 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는 2만 5천 명에서 약 3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 희생자 수는 약 1000명 이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 작전으로 제주 중산간지대 130여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가히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 기간 동안 자행된 것이었다.

이 작전에 선봉을 선 9 연대에 이어 2 연대에 투입된 과격한 반공주의자들인 서청 단원들은 3대대에 편성되어 주민들을 재판절차 없이 학살하였다. 1949년 1월 17일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북촌 사건'도 이 2 연대 3대대에 의해 집행되었다.

제9연대에 의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이 강경 진압 작전은 4·3 사건 전개 과정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이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4.3 사건으로 소각되었던 가옥 3만 9,285동 중 대부분이 이때 방화된 것이었다. 이 강경 진압 작전으로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 농업학교로 보이는 학교운동장에서 귀순자들 가운데 무장대에 협력한 이를 색출하기위해 심문하고 있는 자들과 신문을 받기위해 대기중인 강제 수용자들<제2연대 주둔기 앨범에서>



선무공작과 예비검속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의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공작에 의해 하산한 여자ㆍ어린이ㆍ노인 등 주민들은 서귀포 임시 수용소나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히게 된다. 이 작전으로 귀순하거나 포로가 된 자를 포함 희생된 민간인은 약 1만여 명에 이른다. 이 주민들 중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형식적인 군법 회의를 거쳐 육지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다.

겨우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붙잡혔어.
...제주읍 부두에 있는 주정 공장에 보름 동안 갇혀 있다가 목포항으로 실려갔대. 선창작에서 기다리던 육지 경찰이 즉석에서 수감자와 형량을 알려줬대.
...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작별하지 않는다 p 219~220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는 또다시 비극이 찾아온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 되어 대거 처형되었다.

▲ 1950년 7월 4.3관련 제주도 출신 수형인 300여 명을 포함, 학살직전 대전형무소의 수형인들의 모습과 1948년 대전형무소 전경 <미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소장>

원래 예비검속(豫備檢束)이란 범죄 방지 명목으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으로, 이승만 정부에 의해 과거 좌익 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쉽게 통제·관리하기 위해 1949년부터 조직한 국민 보도 연맹원을 비롯하여 좌익 활동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거나 좌익 사상을 지녔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6.25가 발발하자 북한군에 합류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어 후퇴하던 군경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다.


1950년 7월 7일부터 23일까지 17일 동안 군경의 후퇴 경로를 따라 진행된 것으로 경기도·전라도·경상도 지역이 주요 피해 지역이었다. 특히, 전주에서는 전주 형무소 수감자 1천 명을 포함한 1,121명이 전주 형무소 뒷산 공동묘지와 황방산 등에서 학살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진안 지역에서는 경찰이 약 30명의 예비 검속자를 구금하고 있다가 후퇴하기 직전인 7월 20일에 백운면 신암리에서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다.

제주도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1120여 명의 주민들은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 수장되거나 총살ㆍ암매장되었다. 또한 제주도에서 육지로 이송된 일반 재판 수형인 200여 명을 포함 2500여 명은 6.25 직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이 대부분은 다시 제주도로 돌아오지 못한 채 대부분 행방불명되거나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다.

이때 육지로 이송되어 각지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4.3 관련자들도 함께 즉결처분되었다. 이때 희생된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들은 약 3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0년 대구형무소 수형인 학살 현장,산채로 구덩이에 파묻은채 사살하고있다.대구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행방불명된 제주출신 수형인은 2백여명에 이른다<미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소장>
▲한국전쟁 직후 군경에 인계되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대구형무소 수감자 1402명의 명부, 4.3관련 제주도 출신의 수형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구매일신문(1960.6.7)



 4.3 사건의 결과, 그 후


피해상황과 사과 요구


제주 4.3 사건은 미 군정기에 발생하여 임시정부 수립 이전부터 이후 약 7여 년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었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약 2,5000여 명~3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약 4만여 채의 가옥이 전소되었고 130여 개의 중산간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각종 산업시설과 학교ㆍ면사무소 등도 파괴되었다. 이토록 많은 사상자와 무고한 희생자를 낸 4.3은 1954년 3월에 비로소 끝나게 되지만 그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 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일본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한 사람들은 공공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또한 주민의 상당수가 실업상태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이후에도 극도로 피폐한 생활상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토록 수많은 희생자와 물적ㆍ제산상 피해를 입은 제주 4·3 사건의 주범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 봉기대 및 이를 강제로 진압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전술하였듯 이에 가장 앞장선 서북청년회 등이다. 

;[언론 네트워크] <김관후의 4·3 칼럼>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제주의 소리 /김관후(2014-09-29) 


이처럼 해방 이후 극우 보수 세력으로 친미반공의 기치 아래 그들이 지지하는 정권과 권력에 야합하며 제주 4·3 사건을 일으켜 *제주도민 3분의 1(실종자와 부상자 포함)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p537)에 따르면 10세 이하 어린이 814명과 61세 이상 노인 860명, 여성이 2,985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무차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미국은 미군정에 의해 자행되고 4·3에 가해진 탄압과 학살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들의 재심 등 명예 회복은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잔혹하고 참혹한 역사의 아픈 기록이 면면부절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출처: 제주4.3 추가진상 조사보고서(2020.7.31)


서청의 부활과 변신


서청은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세력이 커진 서청은 오히려 이승만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왔고 결국 6.25 전쟁을 거치면서 토사구팽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박정희 정권의 출범과 함께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다. 박정희 정권의 브레인으로 서청 출신들이 주가 되어 결성된 서북 청년 총연합회의 출신들이 경성제국대학(지금 서울대)과 조선 경비 사관학교(지금의 육사)등에 대량 유입되어 조선 경비 사관학교 5기와 8기들로 박정희 정권의 5.16 쿠데타의 주력으로써 우리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선다. 이들이 국가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이후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도 "비행기를 타려면 TK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대구ㆍ경북 세력과 이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6 공화국 정권의 실세였다.


이렇게 이 세력의 모태가 된 종교 및 우익 단체는 이후로도 민주화 시대 한국 사회의 극우화 담론을 이끌며 줄곧 한국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변신을 거듭해왔고, 그 후손들은 종교계의 지도자와 정ᆞ관계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며 극우 세력을 대표해 왔다.

이는 서북계라는 편향된 지역세와 특정 종파 출신, 그리고 애국보수 이념이 결합된 우익 코드로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도 권력 카르텔을 형성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스펙으로 작용하며 일명 '고소영'이라는 출신들이 대거 정권에 영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2014년 9월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세월호에 반대하는 '서북 청년연합' 결성을 주도하는 등 우리 사회의 극우를 줄곧 대변해 다.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를 자처하는 극우단체가 2014년 9월 28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강제로 철거하려 한 사실에 대해, 당시 조국 서울대 교수는 “서북청년단은 이승만의 전위부대로 수많은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한 집단이다.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도 조직원이었다”며 극우적 행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회원들이 2014년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참사 추모 노란리본을 강제철거하겠다며 기자회견을 하고있다.<출처: 오마이뉴스>

결과적으로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30만 이상의 민간인과 그에 반대되는 세력들을 불순분자 혹은 적대세력으로 몰아 학살한 초법 집단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 같민족의 반역자들과 그의 후손들은 그들만의 공고한 카르텔로 혈연ㆍ지연ㆍ학연으로 묶여 우리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군림하여 오며,

정치ㆍ언론ㆍ경제ㆍ종교계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주류의 권력 집단으로 그들의 이권과 정치적ㆍ경제적 이익에 하는 집단이나 개인종북 세력과 공산주의자 등으로 매도하며, 우리 사회를 이념과 정쟁으로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데 일익을 담당해  것이다. 




오늘날, 여전한 우리의 현실


◽ 한국 종교계의 백태(百態)


지금도 그 같은 행태는 여전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기독교 교단을 대표한다는 단체인 한기총(한국기독교 총 연합회)을 비롯한 개신교 보수 진영은 과거 서청과 같은 투철한 반공 사상에 기반한 이념 논쟁과 주장으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해 서로 대립ㆍ반목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기독교의 최고 가치인 사랑과 평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위기 19장 18절], 그리고 내 이웃을 용서하라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아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마태복음 18장 22절"]라는 잠언(箴言)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한기총) 대표 회장인 전광훈 목사는 2019년 6월 5일 시국 선언문을 통해 "문재인 정권은 그들이 추구하는 주체 사상을 종교적 신념의 경지로 만들어 청와대를 점령하고 검찰, 경찰, 기무사, 국정원, 군대, 법원, 언론, 심지어 우파 시민단체까지 완전 점령하여 그들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며 "자랑스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문재인 정권으로 인해 종북화, 공산화돼 지구촌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았다"며 문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2019년 6월 8일 월간조선 기사)을 발표해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초래한 바 있다.

▲ 전광훈 한기총 대표회장이 2019년 5월 2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4대강 보해체 저지 투쟁 제1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문 대통령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처럼 자신의 발언으로 진보와 보수 진영 그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서 많은 갈등초래하고 있는 전 목사는 그럼에도 지난해(2020년 1월 30일) 한기총 제31회 정기 총회에서 참석자들의 기립 박수 추대로 한국기독교 총 연합회 26대 회장에 또다시 연임됐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란 말인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아무튼 이에 대해 비록 일부의 목소리지만 교회 개혁 실천 연대 등의 단체는 2019년 6월 7일 성명을 내고 "교회는 생명과 평화를 지향하여 국민을 화해와 화합으로 이끄는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지만 한국 교회의 대표임을 참칭(僭稱)하는 한기총으로 인해 국민은 분열되고 사회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최재영 목사의 말마따나 용서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독교 복음의 가치는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고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지난 반세기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이 정권 유지와 권력 찬탈의 단골 빌미로 차용해 정적을 제거하고 국민을 총칼로 다스리던 수단이었던, 엇나간 반공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의 주장과 선동에 좌와 우로, 진보와 보수로,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갈려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슬픈 현실을 살고 있다. 세계 제7위의 군사ㆍ경제 강국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한 오늘의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실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7년11월7일 트럼프 방한일 구국기도회와 2020년1월19일 문재인대통령 하야를 위한 개신교회 신도들의 광화문 예배 장면.  ©천지일보,브레이크뉴스


 여전히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인사들


종교계뿐만 아니다. 공안검사 출신의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과 같은 인사도 문재인 대통령을 공식적인 석상에서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해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어 재판까지 받았다. 고영주는 원래 영화 <변호인>의 모델이 된 부림사건의 담당 공안검사 출신으로 1997년 대검 공안기획관으로 한총련을 이적 단체로 몰아 해산시킨 일등공신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대검 감찰부장과 서울 남부지검장 등 요직을 두루 지냈지만, 2006년 고검장 승진에서 좌절되자 잘 나가던 검찰을 그만두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한창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면서 자칭 ‘애국보수’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 후 이명박 정권에서는 사학분쟁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사학비리의 원조라 불리는 김문기가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교조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하여 2013년 박근혜 정권이 전교조를 해체하고 법외 노조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박 정권의 황교안이 통합당 해산을 해산시키기 위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원서의 대부분이 고영주가 작성한 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할 정도로 통진당 해산의 숨은 일등 주역이었다. 또한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새누리당 추천위원으로 세월호 유가족을 '떼쓰는 사람들'이라 칭하며 진실규명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영화 <변호인>의 실제 검사가 전교조와 통합진보당을 아웃시키고, 세월호의 진실 인양을 가로막고, 공영방송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목 조르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국보수를 자칭하는 인사인 고영주는 2012년 박근혜 정권에서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감사로 임명되고 나서 18대 대선 직후인 2013년 1월 44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회’에서 “나는 1982년 부산지검 공안부 검사로 있을 때 부림사건을 수사했다”며 “부림사건은 민주화 운동이 아닌 공산주의 운동이었고, 그 사건 변호사였던 문재인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라고 주장다.(부림사건 재심은 33년 만인 지난 2014년 2월 13일 최종 무죄판결이 났다.) 또한 2015년 10월 6일 방통위 국감에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일컬어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출처; JTBC, TV조선 방송 화면


 사법계의 현주소


이같이 공식 석상에서 이념 편향 논란을 일으키는 발언을 한 고영주 전 이사장에 대해 최근(2021년 9월 16일) 대법원(주심 안철상 대법관)은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 주장해 시작된 명예훼손 재판의 최종심에서 이는 구체적 사실의 적시로 볼 수 없고,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하였다.


과거 50년 전 벌어졌던 불행했던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이념의 망령처럼 '종북'이니 '공산주의자'니 '빨갱이'를 운운하며 여전히 자유대한민국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셈인데, 대법원은 그걸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용인하고 있으니, 이런 논리라면 누군가가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을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도 그건 개인의 표현의 자유고 구체적 사실의 적시로 볼 수 없으니까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과거 이승만 정권의 조병옥이나 서청이 무고한 제주도민을 학살의 근거로 삼은 '공산주의자' '빨갱이'하는 발언도 단지 '표현의 자유' 말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이뿐만 아니다. 최근 대법원의 정치 사건 판결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을 통해 불법사찰을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2021년 9월 16일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고,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제대로 막지 않았고, 이석수 전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우 전 수석에 대한 나머지 혐의들은 모두 무죄가 확정된 데 이어, 이 고영주 사건마저 모두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되었다. 최근의 이 같은 사법 당국의 일련의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최후 보루이 양심이라는 대법원이 얼마나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는지 그 고무줄 잣대와 판결에 우려를 금할 수 없.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연루된 사법 농단 사건으로 내홍을 겪은 바 있는 사법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양 전 법원장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최근 대선 경선 과정의 핫이슈로 떠오른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에 권순일 전 대법관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다. 

게다가 2021년 10월 1일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2016년 1월 1일부터 올해 8월 31일까지) 퇴직자 취업심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퇴직 법관들 중 취업 제한 규정에 따라 재취업이 제한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는 것만 보아도 우리 사법부가 얼마나 자신들에겐 관대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 정부가 추진해 온 사법 개혁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한강의 소설이 전하는 


한강은 자신의 소설에서 제주 4.3 사건과 그로 인해 파생된 유족들의 한과 슬픔, 그리고 우리가 사건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소설가 한강이 그런 것처럼 우리는 아직 그들을 작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지나간 역사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핑계와 허울로 그날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고 그 속에 묻혀버린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그것들과 작별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날의 아픔과 상처를 평생의 고약처럼 붙이고 사는, 마치 힘없이 불꽃을 피우고 제 생명을 다한 성냥개비처럼 쓰러져 간 그들을 아직 우린 제대로 품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성냥을 그었다. 그러나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아올랐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P325

하지만 부러진 성냥개비처럼 아픈 기억슬픈 잔재 모두 우리가 오롯이 고 가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다. 성냥개비처럼 꺽여진 비극의 역사지만 우리가 숙명처럼 살아가야 할 기록인 것이다.


학살 이후 실종자 가족을 찾기 위한 투쟁의 길고 긴 서사는 반세기를 넘어서고 있고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아직도 유해조차 찾지 못한 비석들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별할 수 없다.

남은 이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국가의 폭력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남은 자의 기억마저 빼앗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2009년10월27일 제막된 4.3 행방불명 희생자표석들과 2016년3월26일 거행된 4.3행방불명인 발굴유해봉안식. 사진 출처: 제주4.3 추가진상 조사보고서(2020.7.31)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신경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뭐 썩는거지
....그렇게 삼 분에 한 번씩 이걸 하는 거야. 이십사 시간 동안 간병인이 곁에서
...얼마나 오래 이렇게 해야 해?
앞으로 삼주 정도.
-작별하지 않는다 p40~41


통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치유되기 위해선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고통을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체의 고통도 그럴진대 마음의 고통은 더 긴 회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돌아오지 않는 인선의 외삼촌을 기다리는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고통처럼 누군가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이의 고통은 살아있는 사람마저 마치 죽은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한다. 죽은 자와 동일시된다. 삶과 죽음이, 소설에서 죽은 새 '아마'가 다시 날아오듯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어느 순간 나의 고통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의 고통이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해서 자신 안에 고통과 직면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 속에 있는 죽은 이의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고통을 들여다보는 걸 멈출 수는 없다. 자신이 고통을 마주하지 않고 들여다보는 걸 멈춘다면, 그래서 고통과 작별한다면 더 이상 자신이 기억하는 이의 삶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게 되니까.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 고통도, 자신의 삶도, 죽은 이의 삶도 모두 함께 고통 속에 죽어 버리게 되니까, 그러니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신의 고통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고 지울 수가 없게 다. 작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죽은 이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으나 죽은 이를 기억할 수는 있다. 손가락이 절단되어 봉합한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 동안 삼분마다 바늘을 찔러 피를 내야 하는 인선의 고통은 마치 죽은 피를 내고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죽은 이를 잊지 않겠다는 성스런 의식처럼 느껴진다.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살이 썩는 것처럼, 우리가 아프다고 4.3의 진실을 알기를 포기하면 그때 죽어간 이들이 다시는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그 고통과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넘기고 나서야 새 생명에 꽃이 피고 죽어있던 심장이 펄떡이고 꺾어진 성냥에 불꽃이 살아나니, 그때서야 덧없이 죽어간 이들은 비로소 새(새 새명으로)가 되어 하늘날아오를 수 있게  것이. 


경희의 고통이 인선으로, 인선에서 인선의 어머니 정심에게, 정심에게서 죽은 자 들로 이어지고 다시 반복되듯이 4.3도 죽은 이에서 남겨진 이들로 장장 70여 년 간  고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 '작별할 수 없음'은 결국 '작별하지 않는다'는 남은 자들의 의지의 표현이자 이음동의어가 된다. 인선의 고통과 경하의 고통과 정심의 고통이 다른 것 같지만 모두 실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 같이, 그건 살아있는 자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방법이고 한편으론 죽은 이를 그리는 사랑의 한 방법일 테니까.




 우리가 가야 할 길.


진실 규명의 과정, 그 결과


어느 사회나 제도나 법규, 이념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적 신념 따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을 지키고 안정된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 이자 공동체의 규범이고 약속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제하고 집행하는 기관과 통치자들이 권력과 부의 단맛에 빠져 축제와 전횡을 일삼게 되면, 그 사회는 폭력과 억압, 강제가 판을 치게 되고 약자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마저 상실하게 되어  많이 가지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그리고 지키려는 자 사이에는 당연히 갈등과 대립이 발생한. 대부분은 모든 국가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진화하고 발전되어 왔다. 그런 과정의 경계인 즉, 역사의 전환기나 격변기를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전쟁과 참사, 유혈 사태, 사건, 항쟁 등은 뒤 따르기 마련이고, 그 와중에 죄 없는 많은 무고한 희생자와 피해자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당시 1940년 대 후반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남ㆍ북한의 위정자들은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보다 권력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종교계는 전투적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월남한 이북계가 중심이 된 단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미군정은 소련에 대항해 동북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주력하던 시대였다. 그로 인해 4.3과 보도연맹 사건 등과 같은 민족의 비극적 사건이 발발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그 결과 민중은 도탄에 빠지고 거리유랑자와 실향민이 넘쳐나던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격변의 시대였다.


그래서 해방 후 친일 잔재를 청산하려는 시도조차 남한에 반공국가를 세우려던 미군정과 그를 등에 업은 이승만과 그 추종 세력들로 인해 서둘러 덮어져서 반민특위 같은 친일파 청산을 위한 노력도 국회 프락치 사건과 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강제로 무산되어 버렸고 김구 선생 같은 분들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ㆍ중ㆍ소와 같은 외세와 권력의 단맛에 빠진 민족의 반역자들에 남ㆍ북이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분단의 아픔을 겪어 오고 있다. 우린 그렇게 역사의 전환기적 혼란의 시기가 있을 때마다 잘못된 주사를 맞고 땜질식 처방만 남발해 온 것이다. 그 결과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해방 후 지금까지 줄곧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해방 후 6.25 전란을 비롯해  1960년 4.19와 5.16 군사쿠데타를 거쳐 10.26 사태, 1979년 12.12사태 등 많은 역사의 격변기를 겪어왔. 그 후 80년 대 들어 독재ㆍ군사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5.18 민주항쟁' 일어나게 되고, 이때 그 민주화 물결을 타고 지역 사회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드디어 역사 편에 묻혀있던 4.3 사건의 진실 회복 운동도 전개되어 나가기 시작한. 그렇게 이 운동은 시작부터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추모 집회와 시위가 제주 지역 학원가를 중심으로 열리게 되면서 당시 정치권에서도 하나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의 4.3진상 규명 촉구대회(1989.4제주대학교 학생회관앞/김기삼)

그러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1999년 국회 본회의 통과) 진상 규명위(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지 근 5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이어진 독재ㆍ군사 정권숨기고 기에만 급급해 왔던 것이다. 우리의 부끄러운 정쟁사가 아닐 수 없다.

그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제주도민과 4·3 사건 희생자 유족들에게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사과를 하였다. 지금 문 대통령 또한 지난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해 피해자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2000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주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있는 장면/ ⓒ공감신문, 노무현 대통령이 4.3위령제에 참가해 묵념하고 있다(2006.4.3)/ⓒ미디어제주


진실 규명 작업의 방해와 단절


하지만 참여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4.3 진상위원회는 폐지되고 진상보고서의 전면 수정을 하는 등 탄압이 가해졌고,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진실을 규명하려던 일련의 국가적인 노력들의 단절을 경험하게 다.

이렇듯 4.3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들은 이해 당사자나 관계 집단의 저항과 그리고 집권세력 방해 속에서 완전한 해결을 못한  정권이 바뀌면 진상규명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들도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은폐되고 중단되어지곤 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도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등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며 계층 간ㆍ세대 간ㆍ지역 간 갈등을 겪어 오고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진상위원회 폐지, 진상보고서 전면 수정 등 탄압이 시작됐다. 이에 맞서 4.3 유족회 등이 나서 규탄시위를 벌였다 <제주4.3 추가진상보고서>

또한 4·3 사건 진상보고서에도 나와있듯 관련자들의 증언 거부 및 미국의 자료 제출 거부와 정치ᆞ종교계의  저항 등으로 그 실상을 온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사건뿐만 아니라 5.18과 같은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건국  독재ㆍ군사정권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과 그에 기생하던 정권의 나팔수였던 언론 등 미디어의 장막에 가려 국민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눈과 귀가 가려진 채로 그들의 꼭두각시처럼 춤을  온 것이다.


가해자들과 그들의 의해 길들여진 이들 마치 '한나 아렌트'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악의 평범함'에 빠진 것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 잘못된 인지도 모른 채 권력의 하수인과 주구가 되어서 피해자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함에 빠져, 혹은 자신의 부와 영달을 위해 애써 외면한 채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길 포기한 말이다.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는 인간의 행동, 그것이 초래하는 끔찍한 결과가 바로 악인 것이고, 이는 곧 제주 4.3 사건이란 비극으로 재탄생된 것이었다.


▲ 2007년 별도봉(좌)과 제주공항의 유해발굴작업 현장(우), 공항에서 총387구가 발견되었고 이 유해는 불법적인 군법회의와 예비검속 희생자들로 밝혀졌다./제주4.3 연구소 소장


◽우리에게 남은 과제


누구나 자신의 상처를 계속 건드리면 고통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부 차원의, 그리고 많은 뜻있는 이들의 4.3의 진상을 규명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한 노력들이 있어왔기에 유해(遺骸)나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3살 때 서귀포 서홍 리장이었던 아버지를 군인들이 아무런 죄 없이 끌고 간 뒤로 볼 수 없었다"며 "그동안 아버지 없이 생활해온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온다" - 아버지 故강문택 씨 유해를 근 70여 년 만에 찾아 4.3 평화공원에 봉안한 강인화(73‧여)씨 인터뷰 내용 중:  "제주 4.3 유해 유가족 상봉"/노컷 뉴스 ( 2018.11.22)

▲ 2018년 1월 제주공항의 유해 발굴현장과  405구 중 신원이 확인된 133구의 유해가 유족들 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70년만에 가족과의 만남'행사 모습/출처: 뉴시스

고통을 마주하고 치유하기 위한 이런 노력들이 부단히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지난 4·3 사건 70주년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언급한 '완전한 해결'이 나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유가족들모든 한과 슬픔을 내려놓고 따뜻하게 안주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가 바라는 것처럼 '지극한 사랑'으로 그 가엾은 영혼들이 우리의 품 안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되길 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주 4.3과 같은 비극의 역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종교계뿐만 아니라  정계와 학계 등 사회 각계각층과 범 정부적 차원에서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5.18 민주화운동 등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과 그로 인해 피와 얼룩으로 점철된 지난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4.3 사건 피해보상법' 등을 구체화ㆍ현실화시켜 그 피해자들에 따뜻한 위로와 함께 속죄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그를 바로 잡고 알기 위한 진실 규명 노력도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반성과 노력들이 한 올 한 올 모여 실타래처럼 커져서 역사의 큰 수레바퀴가 되어 굴러갈 때,

우리는 비로소 4.3과 작별할 수 있고  다시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주 4ᆞ3 사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무수한 만행과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된다.

그 생존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던 것 같다.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 재현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 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기영의「순이삼촌」中-




 에필로그


이 글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와 문헌들을 뒤적이며 다시 한번 그때의 끔찍한 참상에 울분을 금치 못했다. 한강이 소설 <소년이 온다, 2014>를 쓰고 나서, 그리고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의 소설 속 화자인 경희가 5.18에 관한 글을 출판하고 나서 숱한 나날을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일 테다.


나는 70년대 태어나고 자란 세대다. 그 시대는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이런 류의 사건에 대해 배울 수도 없었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 아주 어릴 적엔 북한 모두 만화 영화 '똘이장군'에 나오는 늑대나 돼지 괴수처럼 생겼다고 믿었고, 국민학교에 들어가선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서 선생님께 매번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길을 가다가도 멈춰 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었다. 자정이 넘으면 통금이 되어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었던 그런 암울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겪으며 살았다. 

▲ 1978년 박광순 제작, 김청기 감독의 "똘이 장군-제 3땅굴편"(좌), 1968년 제정ㆍ공포된 국민교육헌장(우)

지금에서야 어디서나 5.18 민주화 항쟁이나 4.3 사건 등에 관해 과거사 진상 규명위가 밝혀낸 보고서를 인터넷으로 편하게 찾아 읽을 수 있지만 그땐 그런 인터넷도, 자료도 거의 없었고 그런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대가 참 많이도 변했다. 그건 모두 1960년 4.19 의거부터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승만과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의 독선과 만행에 저항한 60~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숨져간 많은 민주열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자, 과거 참여 정부 등 민주 정권들의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한 진상 규명의 노력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시대에 이 4.3 사건이 당시 미군정과 정권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나는 공산주의자고 빨갱이다!"라고 스스로 자인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의 4.3은 '사건'이 아니라 공산당 빨갱이들이 일으킨 '폭동'이었으니까, 그로 인해 돌아오는 건 그 무시무시한 '남산 안기부'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밤낮으로 고문을 당할 일 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1978년 4.3을 배경으로 한 소설 '순이삼촌'을 썼던 현기영도 당시 정보기관에 끌려가 무수한 고초를 겪었으니, 얼마나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단어들이 먼 나라 말이었던 시대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1976년 박정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남영동 대공분실 준공당시모습, 이곳 5층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다. 이곳에 잡혀와 죽거나 다친 피해자만 공식적으로 400여명에 달한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나는 성년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당시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이 금지한 '불온서적'과 소위 '빨간 줄 테이프'나 선배들의 구전(口傳)으로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씩 알게 되는 과거의 진상에 더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5.18이 그랬고 4.3이 그랬다.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건 불 꺼진 학생회 방에서 5.18의 참상을 다룬 데모 테이프(demo-tape)볼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게다가 20대 초반인 당시까지만 해도 개신(한국기독교장로회) 신자였던 내게 이런 사실은 신심(信心)에 대한 회의와 함께 참담함마저 들게 하였다. 더욱이 앞서 전술한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에도 나와있지만 그때까지 해도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 교단 내 소속 교회들, 특히 반공 사상으로 무장된 서북 성향의 개신교 장로회 목회자들은 그런 사실을 부정하거나 회개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4.3 당시 한 일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한 '심판'이었으니 그것은 죄가 아니라 이 땅에서 '빨갱이'들을 몰아낸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 후 이미 전술한 '민족선교연구소'나 최재영 목사 같은 일부 양심 있는 단체나 목회자들이 당시의 참상에 대해 회개하고 반성할 것을 주문하였으나 그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불과했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지금도 앞서 살펴본 봐와 같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한기총 회장 전광훈 목사는 대통령까지 종북이니 공산주의자니 하며 대중을 선동하고 있으 말해 무엇하랴.


5.18이 군인들에 의한 폭력과 학살이었다면, 4.3은 정을 비롯해 서청과 같은 토벌대를 차지하고라도, 이승만에 의해 조직된 '민보단' 같은 민간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었다는 점에선 더 끔찍한 사건이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승만 정부에 의해 훈련되어 제주도 군경 토벌작전에 동원된 민간인인 민보 단원들의 숫자가 5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이 학살에 동원되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 1949년 훈련을 받고 있는 제주읍 노형리 민보단 단원들 모습,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들을 민보단원으로 편성해 군경 토벌작전에 동원했다. <제주4.3 평화재단 소장>

한강의  소설은 그때의 충격과 기억다시 떠 올리게 한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권력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되어 사람을 집어삼킬 수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기억들도 세월이 가면 잊혀지고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강은 그것들과 작별하지 않기 위해, 그 잔인하고 아픈 기억마저 가슴에 담고 죽어간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기 위해 한 문장 한 문장 사력을 다해 죽어간 이들의 영혼에다 생명을 불어넣으며 살아있는 이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그녀의 깊은 고민과 성찰그대로 느껴진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시ㆍ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4.3의 아픈 흔적들과 조우한다.


2000년대 들어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노무현 정부와 현재 문 대통령이 4.3 사건 때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도 결국은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런 기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일 테다. 그것은 이 소설의 작가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작별하지 않는다'가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4·3 평화공원에서 생존자와 유족을 만나 인사를 나누며 위로하고있다.ⓒ청와대 기자단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위원회의 진상조사 보고서 624페이지의 기록과 구술자들의 증언집, 그리고 실태 보고서 등 관련 서적 수십 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참혹했던 실상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프고 먹먹해 왔다.

그건 그 일이 비단 제주도민이나 유가족들만의 일이 아닌 우리 민족의 일이고 우리 부모와 선조들이 지나온 발자취이자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목적도 마찬가지다. 단지 4.3 사건 당시 서청의 모태가 되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특정 종파를 비난하거나 아니면 특정 단체나 특정 인사를 매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서청의 수많은 학살자들이나 조병옥과 같이 같은 민족을 탄압한데 앞장선 이들을 찾아서 단죄하고 책임을 물어 지난 과거사를 청산하는 한편 다시는 그 같은 불행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자는 데에 다. 잊지 말아야 제대로 기억하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지난 2013년 그동안 이념 문제로 갈등과 반목을 겪어왔던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와 제주도 재향경우회가 4.3 사건 발발 65년 만에 화해와 상생을 자리를 만들었듯이,

이제는 미움과 반목, 갈등과 대립에서 화합과 상생으로 나아가야 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고통스럽지만 신경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수없이 찌를 수밖에 없는 인선처럼, 4.3 이란 아픈 손가락도 그것으로 인한 고통도 모두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역사의  굴레고 풀어야 실타래다. 때문에 그 상처를 헤집어서 고통스럽더라도 우린 희생자들을 찾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시신조차 없이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일련의 노력을 멈추지 아야 한다.

그래서 우린 아직은 4.3과 작별할 수 없는 것이, 그런 들이 '전한 해결'이  , 우리는 우리의 아픈 손가락을 내려놓고 우리의 슬픈 과거 비로소 작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Copyrightsⓒ트로바토레 2018. / 관련 자료(사진 및 기록) 추가ㆍ보완(2019). 수정(2021).




 주요 증언과 기록들


[언론 네트워크] <김관후의 4·3 칼럼>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제주의 소리 /김관후(2014-09-29):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002339


최재영 목사 방북기: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308


제주 4·3 사건 당시 여성들이 겪었던 기막힌 사건들 -며느리 배 위에 나무판 깔고 올라탄 경찰관들(2018.04.02.):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8446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2003.12)- 원본을 PDF로 전환한 파일(총 624페이지):  

https://drive.google.com/file/d/1_vzv9DJTzE5TYV9s6j5mnVbtl6YZuqiX/view?usp=drivesdk


KBS 제주 4.3 70주년 특집 다큐 그날 :

https://youtu.be/wNI_UHMtSRI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avi:

https://youtu.be/Nl2zqqlBwmg


 당시 서북 청년단원이었던 김경옥 씨 증언 영상

http://jeju43peace.or.kr/bbs/link.php?bo_table=4_4_1_1&wr_id=1828&no=1&page=10




주요 참고 문헌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2021)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2권 -강준만 저-

○위키백과 및 두산백과 <제주 4·3 사건>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 1982

○현기영 소설집  『순이삼촌』,1979

신경득, 『조선 종군 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살림터, 2002)

조사 보고서(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2006),

『민간인 학살 실태 보고서』(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범국민 위원회, 2005)

○4.3 그 진실을 찾아서/양조훈 저, (선인, 2015)

○지샹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창비, 2018, 개정판)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제주 4.3 바로 알기(2016) / 제주 4.3 평화재단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저/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제주 4.3 연구소(엮음), 한울아카데미(2013)

한국전쟁과 기독교 윤정란, 한울아카데미(2021)




 맺음, 감사의 말


이 글은 몇 년 전 타 인터넷 이트 올렸던 글과 그동안 틈틈이 관련 서적과 자료를 들여다 보고 조사했던 메모와 기록들 기반으로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출간에 즈음해 이를 보완ㆍ수정하여 작성하게 된 글입니다. 

원래는 한강의 소설에 대한 감상이나 서평 정도로 마칠 생각이었으나 그래도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제주 4.3 사건이란 무엇인지 그 대략적인 이해는 바탕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서평에다 4.3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와 과정 등을 덧붙여 적다 보니 예상보다 다소 길어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장 7여 년간 일어난 제주 4·3 사건의 전 과정 지면에 모두 담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4.3 사건의 핵심 단체인 서북청년단과 '초토화 작전' 등 일부 사건에만 초점을 맞춰 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피상적 사실과 그 근거의 나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서평 형식 의 특성상 되도록 간략하게 기술한다고 하였지만, 고하고 나니 서평도 아니고 사건 보고서도 아닌 어쭙잖은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점 널리 양지(諒知) 바랍니다.


또한 본문에 기술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일부 정치종교 인사들에 대한 코멘트는 해방 후 우리의 정쟁(政爭) 그 결과 근거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오해 기를 바랍니다.

차후에라도 여건이 허락하 우리 근ㆍ현대사를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입각해 역사의 흐름을 중점으로 기술해 볼 예정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만 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인 한강님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더불어 4.3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시대적 증언을 특유의 유려하고 시적인 표현으로 시ㆍ공간을 넘나들며 한 문장 한 문장 사력을 다해 풀어낸 작가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양심과 지성의 작가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랍니다.





붉은 동백이 힘없이 땅 위에 쓰러지듯
그 많은 가엾은 생령들이 피를 흘리며
죄 없이 죽어갔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이념과 사상 따위가 무엇이길래,
그리고 자고 나면 사라질 화무십일홍에 불과한 그깟 한 줌의 권력 때문에,
덧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주검 앞에 엎드려 명복을 빕니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트로바토레(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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