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오래 전에 가입했지만 아는 사람들에게 폐 끼칠까봐(?) 쓰지 못했다. 그땐 내가 쓴 글이 친구가 된 사람들에게 마구 올라간다는 게 미안했다. 그런 이상한 이유로 가입만 해두고 오랜 시간 묵혀뒀는데 얼마 전에 계정을 새로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아는 사람들에겐 미안하니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짓을 하자는 이상한 논리로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만 친구를 맺었는데 그것도 나름 재미있다. 아무튼 뒤늦게 페이스북의 매력에 빠져 지내고 있다. 페이스북에는 글, 사진, 동영상 같은 것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요즘은 거의 동영상이 대세다. 오늘은 수많은 동영상 가운데 <믿음의 승부>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편집해놓은 영상을 봤다.
미식축구 팀의 훈련 모습이 나왔는데 코치의 지시에 따라 등에 사람을 태우고 10야드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훈련이었다. 이 훈련은 죽음의 포복(?)이라는 훈련으로 미식축구 선수들이 실제로 하는 훈련이라고 한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쉬는 시간, 코치는 자신 없어 하는 한 선수를 불러낸다. 다른 선수들이 보는 앞에서 죽음의 포복을 시키는데 이번엔 정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그리곤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다. 포기하지 말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라며 격려하는 코치. 거북이처럼 등에 사람을 태우고 느릿느릿 기어가기 시작하는 선수. 팔이 부러질 것 같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선수를 계속 격려하는 코치. 코치의 격려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선수. 50야드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 선수는 운동장 전체를 가로질러 버렸다.
이런 생각해본 적 있는가?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궁금해 한다. 하지만 정작 한계라고 생각할 만큼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우린 우리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최선을 다해라’는 식상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계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늘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는 나는 종종 병따개가 된다. 아이들은 휴게소에서 산 음료수를 들고 와 나에게 당당히 요구한다. 열어달라고. 부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 협박일 때도 있다. 부탁과 협박의 중간 정도 되는 느낌으로 나에게 건네진 음료수. 근데 이 녀석 뒤에 저 녀석은 자기 손으로 뚜껑을 열어 마신다. 나는 그때 알았다. 아이들은 대체로 자기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열어보게 했다. 안 될 거라며 투덜대는 그 녀석은 조금 낑낑대더니 금방 열었다. 약간 놀란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허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음료수를 홀짝이며 자기네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면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내가 이런 줄 알았는데 살다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 많이 알게 됐다. 어쩌면 그건 내가 나란 사람에 대해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난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 있으며, 어디까지 가능한 사람인지 진지하게 때로는 몸으로 부딪히며 여행해보지 않아서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매달려 내 자신을 규정하고 그걸로 유리벽 같은 한계를 지어내 살아가면 무기력해진다. 나에게는 한계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한계가 기다린다. 본능적 두근거림은 한계를 가리킨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몸짓. 이병률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걷지 않고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야. 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더라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게 돼.
살아서 꿈틀거리자. 상상을 초월하는 한계가 기다린다. 한계는 뛰어넘으면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이 나를 만든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재료는 그렇게 태어났다. 한계라는 인식 너머에, 결국 내가 존재한다.
거기, 내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