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 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대학 시절, 나는 <연극이 끝난 후>라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때도 한참 오래 된 옛날 노래였으니 지금은 정말 옛날 옛적의 노래다. 1980년 대학가요제 노래인데 지금이 2017년이니 세상에 등장한 지 37년이 지난 셈이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땐 사람을 괜히 우울하고 쓸쓸하게 만드는 노래 같아서 싫었다. 안 그래도 청춘의 우울함이 심각한데 굳이 이런 노래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해 가끔 듣게 되었고, 자꾸 듣다보니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오늘, 그 무대 위의 정적과 어둠, 침묵을 이해한다. 시끌벅적하던 시간이 지나고 남겨진 것들의 성질을 다시 느낀다.
여행이 끝났다. 10일 넘게 이어진 여행은 파란만장했다. 늘 그렇듯 아이들과 함께 했던 이번 여행은 특히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떠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겨 큰 혼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하긴 했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도 역시 수많은 오해와 갈등 그리고 피곤함이 함께 했다. 그렇게 치열한 여행이었기 때문일까? 유난히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일정의 절반이 지나 있었고 아이들과 뭘 해보려 하니 막바지였다. 지쳐서 한국 땅에 떨어진 후 14시간 넘게 잤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놓다가는 끝이 없을 테니. 대신 여행이 끝난 후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남겨진 지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함께 고생하고 어울렸던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떠났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아이들과 떠들고 웃었지만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매일 아침 잠든 아이들을 깨우고 각종 잔소리와 농담으로 하루를 보냈던 시간이 거짓말 같다. 아이들의 삶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운동을 하며 또 누구는 공부를 하며 힘들었고, 어떤 아이는 게임 또 어떤 아이는 친구에 목매달며 살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진지했고 그들의 삶 또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절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아이들과 싸돌아다녔다. 이국의 거리와 빌딩 숲, 수많은 인파와 다양한 사람들, 덜컹거리는 기차와 냄새나는 지하철 그 풍경 또한 꿈 속 장면처럼 남아 있다. 만나고 헤어지고. 떠나고 돌아온다.
이제 내게 남겨진 것들을 본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 한동안 내 삶을 지탱해 준 지친 배낭과 그 안에 물건들. 각종 서류와 카메라. 빨래더미와 우산.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 아이들이 쓴 일지. 먹다 남은 약들. 이렇게 늘어놓고 내 발가락 곳곳에 생긴 물집을 쳐다본다. 자꾸 터져서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니 그 안이 피로 물들었다. 긴 손톱이 눈에 들어온다. 손톱 아래 까만 때를 보니 그냥 두기 어렵게 됐다. 손톱 깎기로 시원하게 깎아본다. 이 손톱으로 누군가에게 상처주진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말이다. 발톱도 깎는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뭔가 달라진 느낌이다. 다시 인간이 된 느낌이랄까.
여행이 끝난 후. 혼자서 텅 빈 방의 정적 속에 앉아 있다. 새벽.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둡다. 지나간 시간의 여운을 느낀다. 내 몸과 마음을 두드린 많은 것들을 돌아본다. 그것들의 온도. 그것들의 명암. 그 짙은 기억에 내가 달라붙어 있다. 밝은 조명 아래 분주하던 그 연극 같은 여행이 끝나 여기 떠내려 왔다. 검은 정적의 공기. 마룻바닥의 딱딱한 냉기. 예고 없이 찾아온 고독은 사람을 차분히 괴롭힌다. 수많은 마주침과 그 얽힘의 이야기가 어느 전쟁의 생생한 증언처럼 남아있지만 그 끝은 결국 혼자다. 지난 시간의 배낭을 곁에 두고 쭈그려 앉는 고독이 마침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삶의 끝자락에 닿으면 필연적으로 느낄 운명적 고독. 그러나 고독이 위대한 것은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도 여행도 시작은 언제나 허락된 것. 힘주어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불 꺼진 이 무대에도 새로운 연극이 시작되리라.
生은 언제나 주인공인 듯 살아내야 하는 여행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