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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딩 숲속 월든 Jun 10. 2023

지금 여기

2주 전 석가탄신일 연휴에 가족들과 평창에 있는 키즈 캠핑장에 다녀왔다. 공교롭게 머무는 2박 3일 내내 비가 내렸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 개의치 않고 마냥 신나했다. 비를 맞든 말든 모래 놀이터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을 지켜보며 놀이터 근처 건물 아래에 있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캠핑장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숲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직은 5월의 강원도 산골이라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촉촉한 비 내음과 섞인 숲의 향기가 너무나 맑고 상쾌했다.  


이 공부를 하다 보니 '지금 여기'라는 말을 많이 읽기도 하고, 스스로 되뇌다 보니 다소 관념적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비 내리는 숲속에 앉아 있던 그 순간에 '지금 여기'가 아주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사실 그런 환경과 조건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즉각적으로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가 있지만, 주변 환경의 영향과 지속적으로 굴러가는 생각의 관성이 강하고, 알아차리는 힘이 충분하지 않으면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핑장에서 생생하게 각인된 '지금 여기'에 대한 체험에 많은 영감을 받은 것 같다. 반드시 평온한 숲속이 아니더라도 흐르는 생각을 알아차리는 순간 '지금 여기'로 돌아온 느낌이 생긴다.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 서서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음을 들으며 길 건너 편 높은 건물을 바라보면서도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 회사에서 상사의 강한 질책과 실현 불가능한 지시를 받으며 바짝 긴장한 순간 속에서도 반짝 알아차리는 순간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


그동안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해외여행을 가거나, 백패킹, 캠핑, 등산 등의 취미를 추구했던 이유를 곰곰이 떠올려보니 결국 '지금 여기'의 경험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럽의 낭만적인 카페테라스에서의 커피 한 잔, 높은 산 정상에서 멋진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는 것, 캠핑장 릴랙스 체어에 앉아 멍 때리는 등 낭만적인 경험을 소유하겠다는 일념으로 여행을 다녀오지만, 정작 여행 내내 생각의 소음에 시달리며 '지금 여기'를 남기기 위해 사진과 동영상만 주구장창 찍은 기억들만 가득하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카페테라스, 캐나다 벤프의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벤치, 피톤치드 뿜어져 나오는 고요한 숲속 캠핑장의 릴랙스 체어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이들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조용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창밖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 것도 전혀 부족함이 없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언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음을 한탄하며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 어디든 알아차림 한 번이면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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