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에 다녀가신 뒤에 TV를 켜보면 볼륨이 거의 최대치로 키워져 있기 시작한 것이 수개월은 되었다. 본가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화제와는 전혀 다른 말로 알아듣고 딴 소리를 하실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걱정 반, 한탄 반인 목소리로 무엇으로든 엄마의 초점이 흐려져가고 있는 것을 짚어 내곤 하셨고, 우리는 형식적인 걱정과 염려의 말을 내뱉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곤 했다. 얼마 전에는 귓가에 웅웅 거리는 이명이 심해지는 것 같다고 하시며 동네 이비인후과에 직접 다녀오셨는데 청력이 많이 떨어진 것을 확인했을 뿐, 뾰족한 치료법이나 증상 완화의 실마리를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난청, 이명 전문 병원을 찾아 엄마를 모시고 간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다행히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또 천천히 이해시켜 주는 의사분을 만났는데, 엄마는 집에서 호소했던 그대로의 증상을 말씀하셨다.
젊을 적에 일을 많이 하셨어요?
그럼요. 일 많이 하고 살았죠
어떤 일을 하셨어요?
아주 옛날에는 농사를 지었고요….
막 시끄럽고 큰 소리가 많이 나는 환경에서 일을 하셨던 것은 아니고요?
그렇지는 않았는데, 젊을 적에도 남들 하는 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분명하고 또렷하게 안 들린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그런 건가보다, 하고 지나갔죠. 그러다가 이렇게 됐어요.
새롭게 안 사실이다. 엄마는 백내장 증세로 안과에 갔을 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냥 그게 자연스러운 것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엄마의 눈과 엄마의 귀와 엄마의 곳곳은 난 대로, 생긴 대로가 기준이었을 뿐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거나 발견했다고 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나 환경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평생을 ‘견디는 쪽’으로 살아 익숙해지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아픈 줄 몰라 서가 아니라, 아프다고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던 시절을 지나온 몸, 남들도 다 그런 줄로 알고 칠십 평생을 살았다. 그러니 털 끝만큼 이상한 기미도 두고 볼 수 없는 요즘에 비추어 보면 그 세월이 불쌍하고 한스러울 것이다. 검사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길
“왼쪽 보다 오른쪽이 더 안 좋으시네요. 청력에 이상이 없는 사람들이 한 100점까지 듣는다고 보면, 오점순 씨는 최고로 잘 들리는 소리를 한 80점 정도 듣고 계시는 거예요. 낮은 소리부터 높은 소리까지 나누어 보면 높은 소리는 거의 한 3~40점대 정도로 밖에는 못 듣고 계시는 거고요. 그 주파수의 소리를 내는 특정 발음이 들어간 단어들은 듣기가 아주 힘들다고 봐야지요. 예를 들면 ‘폐차장’이라고 말했는데 어머니께서는 ‘주차장’으로 알아들으신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보청기를 권해드리고 싶은데, 지금 또 보청기가
정확하게 필요하신 시점인가 싶기는 하네요.”
보청기는 싫어요. 아직은 안 하고 싶어요.
“시끄러운 데는 가시면 안 돼요. 음식도 맵고 짜게 드시지 말고, 커피도 디카페인으로 하루 한잔만 드세요.”
“날마다 복지관에 가서 노래 교실도 가고 민요도 부르고, 또 음악 틀어놓는 데서 체조도 하는데, 그렇게 저는 움직이고 하고 싶은 거 해야 하는데 그런데도 가지 말아요?”
하다가 왈칵, 엄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의사 앞에서 운다고? 마른 눈물인가?’ 싶어 내려다보니 정말로 뜨거운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간호사가 티슈를 건넸고, 의사도 마음이 안 좋은지 한 마디 덧붙인다.
“주위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요, 본인은 이게 이렇게 스트레스였던 거예요. 같이 생활하시는 분들, 가족분들이 왜 못 알아듣냐고 나무라지 말고 잘 알아들으실 수 있게 말하면서 대화에 자꾸 참여시키셔야 해요.”
엄마의 눈물과 의사의 위로로 나는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눈물도 위로도 내게는 송곳 같았다. 애써 외면하며 피해 가고 싶었던 모난 마음구석을 정확하게 겨냥당한 듯.
“어머니 주방에 계실 때 알아듣겠거니 하고 거실에서 뒤통수에 대고 얘기하시면 어머니는 못 알아들으세요. 옆에 있어도 여러 사람이 같이 말하면 그것도 못 들으시고 또 입안에 음식 씹으면서 하는 말도 안 돼요. 가능하면 눈 맞추고 입모양도 보여드리면서 대화하시는 게 좋아요.”
보청기 상담은 3개월 후에 받기로 하고 의사에게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추천받는 것으로 진료가 끝이 났다.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말이 하도 낯설어서 나조차도 그 말을 한동안 알아듣지 못하고 벙찐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자신의 휴대전화를 가져와서는 연결해 둔 이어폰을 조작하며 주변 소음을 지워준다는 그 기능을 설명해 주었다. 조작이 노련하지 않기로는 엄마와 연배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의사도 마찬가지였만 우리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참의사로 느껴질 만큼 보기 드문 친절이라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위로로 느껴졌다. 따가운 송곳 같았던 눈물과 위로의 마무리가 블루투스 이어폰이라니, 의외의 산뜻함으로 진료실을 나오는데 의사가 엄마를 불러 세워 사탕 한 알을 엄마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오늘 우셔서 드리는 거예요. 하나 드시고 기분 푸세요.
선생님은, 당 조절하라고 하시더니 이걸 먹어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의사가 주는 건 먹어도 돼요.
가라앉았던 진료실 공기가 의사의 농담으로 살짝 풀썩거리는 듯 벌게졌던 엄마의 눈가에도 옅은 미소로 주름이 잡혔다. 진료를 마치고 대기실로 나와보니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모녀가 눈에 띄었는데, 아마도 사용 중인 보청기 고장으로 방문한 것 같았다. 나보다도 한참 나이가 많은 듯한 60줄의 딸은 주변의 고요를 너무 의식해서 점점 더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단속했는데 여든은 훨씬 넘은 듯한 엄마는 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탁 트인 목청으로 쩌렁쩌렁하게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 중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딸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그럴수록 엄마는 더 크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너무 작게 말해서 딸이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청 전문 병원이니 그 상황을 보고 누가 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딸은 그 불편과 난처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엄마를 일으켜 세워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엄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화를 내거나 난동을 부리는 것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사소통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딸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었지만 연신 상체를 수그리며 주변을 의식했다.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기실 밖으로 사라지는 노년의 모녀를 흘끔거리며 화장실에 갔던 엄마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 광경을 엄마가 보지 못한 것이, 오늘의 다행 중 가장 큰 다행이라 생각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은 생각보다 많았지만 유난히 귀가 작고 귓구멍도 작은 엄마의 귀에 맞는 이어폰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자전거를 즐겨 타고 활동량도 많은 엄마가 스마트폰과 연동해야 하는 그 기기에 제재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지도 관건이었다. 내가 그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엄마는 또 엄마대로 귀마개를 사서 써보고 있다고 하시기에 어느 주말에 가보았더니, 놀랍게도 다이소에서 파는 천 원짜리 스펀지 귀마개였다. 삼성 갤럭시 버즈 3가 다이소의 스펀지 귀마개로 둔갑되는 사이의 무수한 장면들이 지나가며 순식간에 가슴이 텅 비어버렸다. 왜 엄마는 삼성 대리점으로 가지 않고 다이소로 갔던 걸까. 왜 나에게 무얼 사야 하는지 묻지 않고 홀로 다이소로 갔던 걸까. 엄마는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엄마가 다이소가 아니라 삼성 대리점으로 가서 버즈 3을 스스로 결제하고 왔더라면 나는 조금 덜 슬펐을까. 천 원짜리 귀마개를 집어 들고 엄마는 또 눈물을 훔치지 않았을까. 천 원짜리 다이소 귀마개가 엄마의 청력을 다시 회복시켜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펀지 귀마개를 실견하고 보니 그것은 안 그래도 작디작은 엄마 귀에 들어맞을 사이즈가 아니었다.
“저녁에 중랑천에 가서 체조할 때 이게 자꾸 빠져.”
‘당연하지. 이게 어떻게 맞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엄마 귀가 얼마나 작은데’
“그래서 요렇게 귀마개가 안 빠지게 둘러서 고정하는 귀마개를 하나 더 사야겠어”
‘엄마 제발 그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천 원짜리 귀마개만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값싸고 신속하고 간단한 조치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우리 마음이 지금보다는 조금 나았을까. 아마도 엄마는 천 원짜리 귀마개로 못 듣는 소리 없이 다 들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만 같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귀마개를 만지작거리는 내게 그제야 또 한 번 고백을 해왔다.
어제 복지관 가서 사물함 짐도 싹 뺐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래교실, 무용교실, 민요교실도 모자라 심리상담까지 받고 있던 엄마였다.
엄마.
그래서 또 옴팡 울었다.
그 말을 하면서 엄마 얼굴이 또 한 번 붉게 어그러졌다. 꽝꽝 울리는 소리 나는 데 가지 말라던 의사의 말을 듣고 끝내 울음을 쏟았던 엄마가 스스로 내린 결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엄마는 70 평생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견디고 순응하는 방향을 택했다. 생활의 낙이자 치료제였을 소소한 즐거움을 완벽하게 소거해 버리는 것으로. 시간 여유를 두지 않고, 자조와 절망의 빛이 드리워지기 전에 내린 전면적인 결단으로. 자칫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깔끔하고 간편한 말로 덮어버릴 수도 있겠으나 나는 어쩐지 엄마의 그 선택이 고귀하고도 중대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숙명을 받아들이겠노라는, 하나 결코 그것에 무너지지 않겠노라는. 노인복지관에서 어렵게 맡은 사물함을 비워내고, 손때 탄 짐을 자전거에 옮겨 싣고, 찬 바람을 맞으며, 연신 뜨거운 눈물로 뺨을 적셨을 엄마가 얼마나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