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성공한 인생의 정의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아버지 한 분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술에 취해 사람들과 싸우고 술집에서 난동을 부려 경찰관들이 우리 집을 찾아오고 엄마가 경찰서에 가기도 했다. 집에 있는 집기류와 가구, 문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원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 없을 정도였다.
겨울 어느 날 남의 집 연탄 창고에서 쪼그려 앉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갔다. 문에 가까울수록 비린내 같은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다.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들이 보였다. 유리재떨이가 문 앞에 산산조각이 나있었고 피 묻은 휴지들 옆에는 말라있는 피 웅덩이와 코를 골며 잠에 든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 본인이 던진 재떨이에 본인이 찔려 피를 흘리며 잠이 든 모습, 나는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가 좋았던 모양이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거짓이고 나에게 웃으며 안아주는 모습이 진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전제로 추리를 하고 아버지의 선함을 찾는 증거들을 수집하곤 했다. 진실 혹은 거짓 게임을 혼자 수도 없이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인지? 악마인지? 나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인지? 어린 나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우리 집. 미워해도 좋아해도 안 되는 대상이 되어버린 아버지. 천사 같은 아빠의 모습을 기억 깊은 곳에 보관하려 애썼다. 그래야 내가 조금은 더 행복하고 웃을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 집안은
대대로 사업가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물질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컸다. 이것은 순전히 내가 본 시선이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사교육도 받고 든든한 지원으로 그 시절 대학원까지 나왔다. 아버지 친구들 또한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정치인, 사업가, 의사 등 멋진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아버지의 그때 모습으로는 친구들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이유로 인해 경찰들이 집으로 오고 주변 이웃들이 시끄러워 못살겠으니 이사 가라고 소리 지를 때도 아버지의 잘 나가던 시절을 상기시키며 자존심을 지켰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똑똑하고 잘생긴 아버지가 침을 흘리며 환자복을 입은 채로 정신병원에서 마주했을 때는 내 자아마저 분리되고 무너질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그렇게 산 결과인지,
질병으로 고통받는 노인이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오히려 더 괴로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간과 심장이 안 좋았고 병세가 깊어져갔다. 병원에 모시고 가면 무조건 수술을 해서 고쳐달라고 의사에게 졸라댔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창고에 숨었던 어린 나처럼 의자밑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버지는 근무 중인 나에게 전화를 수도 없이 걸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프다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내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분명 안 좋은 얘기일 테니까. 또 보자마자 수술시켜 달라고 조르는 전화일 테니. 한 번은 화가 나서 말없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전화기에 내 이름만 부르더니 계속 울기만 하셨다. 나는 몇 마디 질문을 하다 말고 화가 치밀어 "아빠가 아프든지 말든지... 왜 나한테 그러냐. 나 좀 그만 괴롭히세요."라며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리고 몇 달 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침대에서 나올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종일 누워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밤이 되었는지 내가 자는지 깼는지 몰랐다. 마치 내가 아버지와 함께 관에 들어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했다.
신체의 일부마냥 가지고 다니던 아버지의 10년도 넘은 가방 손잡이는 낡아서 실밥이 몇 가닥 빠져나와있었다. 가방 옆 주머니에는 우리 가족의 낡은 사진 한 장이 접혀 있었다. 항상 지니고 다니셨던 모양이다. 나는 야수처럼 소리높여 울 수 밖에 없었다. 몇 개 남지 않은 유품을 들여다보며 내가 알지 못하던 것들이 많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쭉 아버지가 인생의 실패자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괴롭혔던 악마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오래된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간절한 기도문들이 눈에 띄었다. 빼곡하게 적힌 전화번호들과 여러 가지 문장들... 특히 오랜 시간 연락을 끊은 형제들의 연락처와 주소가 맨 앞줄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아버지의 꿈을 막아서려 아버지의 형과 어머니는 한 달을 아버지를 방에 가두었고 이후 진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삶은 오해 투성이다.
아버지가 진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웠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도 공감해 준 적도 없다. 나는 이기적이었다.
모두에게는 남모를 속사정이 있는데 나는 내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했었다. 개인은 각자의 아픔을 짊어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인생에 객관적인 체크리스트를 들이밀고는 '한심한 인생이군.'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다. 그 누구도.
주어진 조건과 상황 속에서
오늘도 할 수 있는 만큼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낸 것,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