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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27. 2024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를 배운다.

나를 키운 마을, 나를 만든 사람들, 나를 이어갈 사람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나 또한 한때 아이였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거쳐 갔다. 이를 떠올리면 참으로 겸허해진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동네, 도시, 그리고 나라에 이르기까지. 온 마을 전체가 헌신적으로 내게 자라날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온기가 깃든 밥을 먹고 자랐다. 마을 사람들의 삶과 역사는 내게 유산으로 전해졌고, 나는 그들의 노고가 담긴 밥상을 수없이 마주했다.


언어를 배우는 아기가 되거나 그 곁의 보호자가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말을 배우는지를 살펴보면, 언어를 가르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국어가 된 한국어를 나에게 물려준 나의 언어적 부모들을 떠올려본다.


부모와 아기는 언어를 주고받기 위해 언제나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내가 한국어를 배운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는 갓난아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아기가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마음이 담긴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이다. 부모는 쉬지 않고 계속 말을 건넨다.


누워만 있던 갓난아기는 곧 뒤집기를 한다. 엉금엉금 긴다. 도움을 받아 일어서고, 비틀대며 걷는다. 발걸음에 점차 힘이 실리면 아이는 홀로서기를 해낸다. 이내 뛰기도 한다. 동시에 언어적으로는 모국어 소리를 접한다. 소리에 익숙해진다. 옹알이를 하듯 말을 따라 한다. 알파벳을 알게 된다. 알파벳을 가지고 블록놀이를 하듯 글자를 조립하기 시작한다. 모국어를 인지하고 글자와 문장을 읽어낸다. 글자 도구들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보호자는 본격적으로 그들의 말과 글자를 가르친다. 필요하면 대신 글자 블록을 이용해 문장을 조립해주고,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준다. 언어 사용에 있어 그들의 규칙을 완벽하게 습득해 자립할 때까지, 언어적 부모는 묵묵히 제 역할을 계속한다.


언어를 배우는 아기가 되거나 그 곁의 보호자가 된다면, 이런 점진적인 단계를 다시금 온몸으로 자각하게 된다.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그럼 이제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의 부모님은 언어를 다루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들의 언어 유산은 그렇게 내게 자연스레 전달됐다.


아빠는 항상 책을 좋아하셨다. 퇴근 후에는 책방에 들러 만화책이나 책을 한 아름 안고 집에 돌아오셨다. 젊은 시절의 아빠가 배 위에 나를 앉히고 책을 읽어주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 무지막지하게 두꺼웠던 컴퓨터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텍스트를 읽던 모습도 떠오른다. 주말이면 아빠와 함께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면서 아빠와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간이 나를 이야기의 세계로 이끌었다. 요즘에도 아빠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잠드신다.


엄마는 내 주변에서 가장 한국어 구사력이 뛰어난 분이다. 엄마는 한문 교사가 되려 했지만, 교생 실습 이후로는 옥편을 닫아버렸다. 그래도 엄마 안에 이미 내재된 한국어 어휘력은 여전히 남다르다. 가끔 엄마는 내 언어 실력을 칭찬하신다. 하지만 그 출처가 엄마라는 것은 전혀 모르시는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자란 나는 부모님께 거저 전수받은 이 언어로 이제 누군가의 언어적 부모가 되어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수업을 하다 보면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국어를 배우고자 나를 바라보는 외국인 학생들의 얼굴에서 아기새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그들에게 질 좋은 모이를 물어다 주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새가 된다. 한글을 하나씩 건네주며, 이것을 가지고 조립해보라고 하고, 읽어보라고 하고, 말해보라고 한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면서, 나를 키워낸 부모님과 주변의 모든 이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본다.


마을과 언어를 치환해보자.


한국어 마을에서는 어엿한 조력자일지 몰라도, 나 역시 프랑스어 마을에서는 여전히 서툰 아이에 불과하다. 2년간 프랑스어를 배웠고 대략 초등학교 2학년 수준에 들어선 것 같다.


핵심은, 성인이 되어 제2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다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보았다는 것. 그 결과, 성장의 길에서 학습자들이 겪는 고통을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은 프랑스어 실력이 조금 향상되었다고, 초심자가 겪는 감정에 무뎌진 것 같았다. 그래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신생아가 되어 새로운 마을에 툭 떨어져 보니, 곧바로 낯설고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내 환호하며, 매 수업이 끝난 뒤에 남는 그 설익은 실력과 미완의 감정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다. "바로 이거다. 바로 이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는 한 마을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말이다.


나는 결코 혼자 성장하지 않았다.



나는 전문적인 번역가나 통역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어 학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를 키워준 어른들 덕분에, 나는 언어를 폭넓게 감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어 교사가 됐다. 이제 한국어로 생계를 유지하며 내 밥을 짓고 있는 나는 결코 혼자 성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만 배부를 수는 없다.


이제는 한국어가 고픈 학습자들을 먹이고 키우는 데 일조할 때다. 엄마이자 보호자, 친구이자 누나, 언니. 작은 불빛을 비춰주는 길잡이, 혹은 잠시라도 짚고 설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존재가 되어 내 몫을 하려면, 밥을 짓지 못해도 최소한 반찬이라도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한국어를 배우는 성인 학습자들이 언어 학습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 마을의 역사는 이렇게 여러 밥상을 거쳐 가며 계속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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