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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랑 Jan 22. 2019

실망시키는 딸



내 나이 서른 하나. 그런데도 여전히 아빠는 술 한잔하고 집에 오는 날이면 ‘우리 딸은 언제쯤 회사에 다니려나’하고 혼잣말을 한다. 이 혼잣말은 무의식적인 술주정 같기도, 의식적인 질문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취업하라고 채근하는 것 같아 그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만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마!”


짐짓 당당하다 못해 짜증까지 섞인 목소리만 들으면 꼭 알아서 잘하고 있는 데 아빠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그다지 알아서 잘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 만큼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고 있고, 언젠가 덜컥 데려와 식구가 된 고양이도 내 힘으로 기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부모님이 내어준 방 한 켠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알아서 잘하고 있다는 말은 누가 봐도 틀렸다.

스스로는 비교적 만족스럽게, 지금 나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잘 지내고 있지만, 가끔씩 이런 대화가 오고 갈 때면 어쩔 수 없이 씁쓸해진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부모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불효자가 된 것만 같은 생각에 덩달아 내 마음도 무겁다.



이런 생각은 과거에는 더 자주 나를 괴롭혔다. 어릴 때 내 꿈은 소아과 의사였는데, 소아과를 택한 건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의사가 되기로 한 건 부모님이 좋아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면 3층 집을 사서 1층엔 병원을 차리고 2, 3층에서 부모님이랑 위, 아래에 살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 얘기를 듣고 환하게 웃으셨던 부모님을 보는 게 좋았다. 그 덕에 게으르지 않게 공부했고, 학창시절의 난 어디 내놓아도 남부끄럽지 않은 딸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고2가 되어 문·이과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별안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선생님이 참고하라고 나누어 준 책자에 나열된 직업들을 보고 있자니, ‘이과’난에 적혀 있는 직업들은 모두 따분해 보였다. 연구원, 제약회사 직원, 소프트웨어 개발자, 엔지니어…. 전도유망한 직업들이지만 끌리지 않았다. 반면 ‘문과’난에 있는 직업들은 하나 같이 흥미진진해 보였다. 그렇게 문과를 선택했고, 그럼 선생님이 되는 건 어떻겠냐는 부모님의 조언을 가뿐히 무시하고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피를 극도로 무서워해서 그레이 아나토미 등의 의학 드라마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애초에 의사가 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졸업 후 일하던 홍보 대행사에서는 1년 반 남짓 일하고 사표를 썼다.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절대 달갑지 않은 약속과 함께. 그렇게 조금씩 부모님의 기대에서 멀어졌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의 속을 썩였던 내 동생이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부터는 우리 집의 자랑이었던 나는 공식적으로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골칫거리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을 돌이켜 보면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였던 것 같다. 


하루가 멀다고 보도블록을 갈아엎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스페인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길을 걷고 있으니 자연스레 중세 유럽의 모습이 그려졌다.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모습들의 재현에 불과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도,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도, 군중에게 몰매 맞는 죄인의 모습도 금세 눈앞에 펼쳐졌다. 피카소, 달리 등의 유명한 예술가들부터 거친 손으로 구두를 매만지는 이름 모를 남성까지…. 한 번이라도 지금 서 있는 이 땅을 밟아 봤을 사람들을 무작위로 떠올려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분명히 이 사람들의 하루하루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존재가 의심될 정도로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도 그들 개개인에게는 치열한 투쟁의 여정이었겠지? 가난한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먹이기 위해 투쟁했을 테고, 귀족은 나름대로 사회에서 규정된 자신의 역할과 본분을 다하기 위해 투쟁했겠지…. 때론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랑이 신분 차이에 막혀 좌절하기도 했을 테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맞기도 했을 거야. 그런 삶들이 수 세기에 걸쳐 펼쳐졌다가 사라졌고, 내 삶도 마찬가지로 끝내는 기억되지 않을 누군가로 후세에 기억되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다른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개’일 테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난 ‘아무개’일 텐데,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다. 설사 그게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길이 되더라도.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서는 편할 대로 생각하기로 해버렸다. 인간은 (나를 포함해 부모님도) 사는 동안은 곧잘 생의 유한함을 잊곤 하지만 결국 생의 유한함 앞에 서면 누구나 사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그러니 내가 태어난 순간에도, 죽는 순간에도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바라는 건 결국‘건강하고 행복한 삶’단 하나뿐일 거라고.


그렇죠,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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