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밭에서 생각한 치유의 농사
우리 가족은 주말농장이라 부르기엔 제법 넓은 밭을 가꾸고 있다. 매년 고구마와 감자, 배추를 심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고구마 수확의 시기가 찾아왔다. 원래는 긴 추석 연휴 때 일을 끝낼 생각이었지만, 모두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일정이 미뤄졌다. 다시 미루고 싶었지만, 다음 주엔 서리가 내린다는 예보가 나와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결국, 예정보다 뒤늦게 밭으로 향했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원예치료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연구를 살펴보며, 식물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으로 이어지는지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고구마 수확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하나의 실험처럼 느껴졌다. 최근엔 이유 없이 마음이 자주 불안정했는데, 흙을 만지며 그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길 바랐다.
오랜만에 밭에 들어서자, 방치된 시간의 흔적이 한눈에 보였다. 고구마 덩굴이 옆 고랑까지 뻗어 있었고, 제때 수확하지 못해 줄기가 지나치게 두꺼워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뿌리는 자라지 않고 덩굴만 무성했다. 거름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게 신기했다. (고구마는 거름을 주면 잎만 무성해지고 땅 속 뿌리가 잘 안자란다) 매년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작물을 보면, 농사는 늘 예측할 수 없는 운에 맞기는 일같다.
예초기로 덩굴을 쳐낼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낫으로 바꾸어 줄기를 자르기 시작한 후 30분, 고관절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통증이 밀려왔지만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통증도 경감시킨다는 연구를 떠올리며, 나도 그 효과를 믿어보기로 했다. 일을 이어가며 통증을 잊기위해 다양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작업정원은 참여자의 건강상태에 맞는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치유를 위한 노동과 단순한 노동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하는 점 등.
결국 올해의 수확량은 작년의 절반인 다섯 상자 남짓이었다. 고생한 시간에 비하면 초라한 결과였다. ‘차라리 사 먹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냉소적인 생각이 스쳤고, 다음 날엔 온 관절에 열이 올라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다.
그래도 그날을 돌아보면 몇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처음 밭에 도착했을 때의 공기, 덩굴을 걷으며 스쳐간 흙냄새, 점심을 먹으며 바라본 고요한 밭의 풍경. 그 순간들 덕분에 하루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정도면 충분한 효과였는지도 모른다.
올해 고생이 많았기에 내년엔 땅을 파지 않아도 되는 작물을 심으려 한다. 옥수수나 콩처럼, 조금 더 몸에 부담이 덜한 작물들로 말이다.
그리고 수확한 고구마는 아직 먹지 않았다.
아직은 밭의 냄새와 그날의 통증이 남아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때쯤에야 고구마를 삶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나만의 회복 방식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