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내면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봐도 알 수 있는건 깊은 어둠 뿐이었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얻은 결론이라고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나보다. 그저 지금 여기에 생각하고 있는 ‘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안심해야 했던 것일까.
불교에서 깨달아야 한다 말하는 공(空), ’비어있음’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 우리 내면의 어두움에 대한 은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창백한 푸른 점처럼. 끝을 알 수 없는 넓고 넓은. ‘넓다’는 것도 의미가 없을 정도로 광활하고 검푸른(玄) 우주공간에서 스스로는 빛날 수 조차 없는 고작 하나의 푸른 점일 뿐인 지구 행성처럼.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 내면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창백한 사실, 그러한 인사이트(insight)뿐이다.
어느날 문득 안으로 깊숙이 꺾여있던 목과 머리를 들어 저 밖을 내다 보니 비로소 수많은 의미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반짝이는 당신의 눈빛,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푸르름, 멀리서 풍겨오는 고소한 빵 냄새. 그랬다. 밖은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의미들이 저렇게나 쌓여있었다.
언젠가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을 떠올려 본다. 여전히 카메라속에 담겨있는 낡은 필름을. 그것을 현상 하기 전까지 필름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희미한 잔상, 갈색의 물성, 독특한 화학적 냄새 뿐이다. 셔터를 눌러야 했던 벅찬 순간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아무리 필름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봐도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마치 우리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들과 세포안의 원자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차갑고 공허한 의미의 일각一角만 드러날 뿐인 것처럼.
그래서 그 필름은 현상 되어야만 하는 것. 현상 되어야만, 그래서 비로소 우리의 눈에 들어와 우리에게 다시 감각 되어야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소중했던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지난갔던 과거의 찰나가 다시 내면에 재현되는 것이다. 그때의 향기, 그때의 마음, 그때의 소리들은 생생히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이 늘어져 버린 과거는 마치 본래 하나의 점이었던 것처럼 지금이 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몸이 있다. 아니 우리는 몸이다. 낯선 세계를 알기 위해. 그러기 위해 감각하기 위해. 그래서 이 세계를 이해하고 연결되기 위해.
Conexus ergo sum
나는 연결되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만히 앉아 오랜 시간을 기도하며 수행 하더라도 어쩌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허함 뿐일지 모른다. 복잡한 내면을 비우고 비워도, 그곳에서는 비워졌다는 것과 그리고 사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만을 알게될 뿐. 결국 원래 인간이 그런 존재인지 모르겠다. 홀로는 알 수 없는, 홀로는 아무것도 아닌, 당신들과 연결 되어야만, 그래서 서로에게 감각 되어야만, 그렇게 느껴져야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이 삶의 의미를, 이 세계 의미를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