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션뷰 Apr 10. 2023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생각한 일본인들에게 죽음이란?

과몰입과 딴생각 ep.8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일본에서는 지진이란 재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 이은 작품으로, ‘재난 3부작’의 세 번째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지진’이라는 재난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미즈’이다. (일본 열도 전체에 흐르면서도 지진을 일으키는 힘을 형상화한, 거대한 지렁이의 모습을 한 존재)


영화에서는 뒷문 너머의 저세상에 존재하며, 다이진과 사다이진이라는 두 요석이 미미지의 각각 꼬리와 머리를 억눌러 봉인하고 있다. 하지만 스즈메가 우연히 꼬리의 요석 다이진을 뽑아버려, 미미즈가 날뛰게 되는 것이 전개의 시발점이다.


미미즈는 의지나 목적이 있는 ‘생명체’는 아니며, 단지 지진을 일으키는 근원 그 자체로써 묘사된다. 

악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어쩔 수 없는 재난이 일어나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냥 폐허의 뒷문으로 새어 나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무언가. 이것을 막는 이가 있지만 막지 못한다고 하여도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그런 그냥 무언가'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재난을 표현한 것이지 않나 싶다.


인간은 왜 오래 살고 싶어 하는가?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여!

부디 부탁드리옵나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주요한 명대사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제일 이해가지 않는 장면이기도 했다. 왜 인간은 오래 살고 싶어 할까? 아니, 왜 오래 살아야 하는가? 왜 스즈메는 소타를 구하고, 왜 다이진과 사다이진은 다시 요석이 되어야 했을까? 평생을 요석으로서 미미즈를 억누르며 제 역할을 다했는데, 인간이 잠시라도 오래 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그 둘은 다시 자발적으로 요석으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스즈메와 소타에 의해 희생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일본의 지진이라는 재난을 이해하고 나니 다르게 들렸다. 일본은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재난적 배경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현지 개봉판에서는 극 중에 지진 경보음이 자주 나오게 되는데 이것에 대한 안내 사항을 고지한 후에 시작한다고 한다. 똑같은 효과음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하게 나오기 때문에 일본인 또는 현지 거주민들에게 있어 상당한 불쾌감이나 PTSD를 일으킬 수 있기에 양해 메시지를 띄운 것이라고 한다.

또, 작중 등장하는 지역들은 모두 현실에서 재난이 있었던 곳이거나 그 인근이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 1995년의 효고현 남부 지진, 1923년에 관동 대지진 등이 있다.

제작 초반까지만 해도 잔존하는 슬픔과 상처를 영화로 다뤄도 될지, 또 일본 관객이 이를 허용해 줄지 의문이 들고 불안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대적/세대적 트라우마를 남긴 큰 재해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상처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걱정이 앞섰다고. 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나고 12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다루지 않으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았으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에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원하는 만큼 더 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일본의 재난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도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런 재난 상황이 많았기에 일본인들에게는 죽음이 우리보다 좀 더 문턱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과 삶은 무엇일까?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1년, 하루, 잠시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는 그 염원이, 이젠 더 이상 단순히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처럼 언제 다시 뒷문이 열려 재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진과 사다이진이 미미지를 억누르고 있으리라는 믿음,

그리고 스즈메와 소타가 뒷문들의 문단속을 해주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덕분에 우리는 하루라도 더 안전할 것이라는 염원,

이런 것들로 인한 마음의 안정이 영화를 보는 단 두 시간만이라도 느꼈다면 좋은 영화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 IP가 영화로 만들어지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