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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Oct 24. 2019

두 번째 부산 여행에서 깨달은 것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부산을 찾는다. 한여름 밤의 낭만과 추억을 위해, 오감을 만족시키는 식도락을 위해, 혹은 부담 없는 일탈을 위해.


나 역시 어릴 적부터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가끔 부산을 찾았지만, 오롯이 자의로 부산을 여행한 것은 2015년의 일.  이유는 조금 우습게도 일본 유학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울에 살았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광화문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찾았지만, 본적지가 대구이므로 부산에서 신청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 덕에 휴가차 부산에서 1박 2일을 보냈고, 해운대와 감천문화마을, 국제시장, 자갈치 시장, 차이나타운 등을 야무지게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4년 후, 나는 또 부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일하는 남편의 배우자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역시 1박 2일 동안 부산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톡톡히 누렸고, 그 덕에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됐다.




역시 부산하면 밀면이다

확실히 부산은 미식의 도시다. 국밥과 냉채족발, 싱싱한 해산물, 어묵, 암소갈비, 오리불고기, 비빔 당면, 씨앗 호떡 등 육해공을 가볍게 아우르는 향토요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나 역시 소위 블로그나 여행 잡지에 기재된 '부산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면 한 번쯤은 다 맛보았는데, 그중에 두고두고 생각나는 요리가 바로 이 밀면이다.

초량역 근처에서 먹은 밀면 @fromlyen


밀면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이 이북에서 먹던 냉면을 재현한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메밀을 구하기 어려워 밀가루로 대체했고, 그 덕에 씹는 재미가 있는 쫄깃하고 탱탱한 면발이 탄생했다. 하지만 밀면의 차별화된 무기는 바로 오묘한 양념과 육수가 아닐까. 새콤, 매콤, 달콤한 맛이 삼박자를 이루는 빨간 양념과 은은한 생강 향이 감도는 육수는 일반 물냉면보다 상쾌하고 깊은 맛을 자아낸다. 주전자에 따로 담아주는 따뜻한 육수는 또 얼마나 감칠맛이 나는지.


부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밀면 가게가 있는데, 그중에 할매가야밀면, 국제밀면, 개금밀면, 춘하추동밀면, 초량밀면 등이 맛집으로 꼽힌다. 아마도 나의 세 번째 부산 여행은 오로지 '밀면 투어'가 되지 않을까.



추억 여행을 원한다면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레트로 열풍과 맞물려 새롭게 주목받는 보수동 책방골목. 역시 전쟁 후,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 씨 부부가 미군부대나 고물상에서 나온 헌책을 팔기 시작하면서 조성된 곳이다. 인터넷과 전자책이 없던 시절 종이책의 위상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잡지나 문학 작품뿐 아니라 교과서와 문제집도 저렴하게 살 수 있으니, 서민들에게는 오랫동안 지식의 샘 역할을 해왔으리라.


개인적으로는 어릴 시절 즐겨 보던 잡지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종이 사전 등 세월에 빛바랜 진귀한 자료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또, 곳곳에 개성 있는 북카페와 스튜디오가 들어서 인스타그래머들의 관심을 끄는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은 향수 어린 골목 상점의 정취, 그 자체가 아닐까.


보수동 책방골목의 정다운 풍경 @fromlyen



아침에는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좋다

나는 공원을 무척 좋아한다. 여행지에서 머물 호텔도 주변에 공원이 있는지 보는 편이고, 집을 구할 때도 역세권보다는 '공(원)세권'을 선호할 정도다. 이번에 부산에서 머문 숙소는 부전역에 위치한 이비스 호텔이었는데, 운 좋게 도보 10분 거리에 부산시민공원이 있었다.


부산시민공원의 산책로와 주변 풍경 @fromlyen


뜨거운 햇살이 일치감치 공원을 점령한 8월의 아침. 공원 광장에 대형 풀이 설치되어 아이들은 그곳에서 수영을, 어른들은 주변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시민공원이 오늘날처럼 ‘시민’의 소유가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본래 1900년대 초반까지 기름진 농가와 주거지였던 땅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게 빼앗겼고, 그 후에 미군이 주둔하며 다시 한번 남의 땅이 되었다. 그러던 1995년, 미군의 철수와 함께 토지 반환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2011년 부산시민공원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공원 한켠에 마련된 정자 @fromlyen


사실 부산에는 부산시민공원 외에도 UN기념공원과 민주공원 등 역사적인 의미가 서려 있는 공원이 많다. 항구도시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부산'이라는 단어만 되뇌어도 어디선가 바다 내음이 느껴지는 듯 하지만, 하루쯤은 나무와 꽃, 그리고 풀 향기로 가득 찬 공원을 걸어보자.



꼭 핫플레이스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부산에서 무사히 비자를 받고 서울로 가기 전,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기차 출발 시간은 오후 1시 반이었고, 호텔 체크아웃 시간은 12시, 그리고 당시 시간은 10시 44분이었다.


"우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짐을 끌고 한 군데를 더 돌아봐야겠지. 마지막 점심은 뭐가 좋을까?"


바다가 보이는 해운대 카페와 감천문화마을, 서면역 브런치 맛집 등 핫플레이스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빠듯한 시간과 무거운 짐 탓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대로 호텔이 있는 부전역으로 돌아가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이내, 길거리 토스트에 눈길을 빼앗겼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한국식 토스트 또한 해외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명물 요리다. 갖가지 야치를 넣은 달걀부침과 식빵을 철판에 노릇노릇 굽고, 얇게 썬 양배추와 슬라이스 치즈를 올린 뒤, 마요네즈 베이스의 특제 드레싱을 두르고, 설탕을 솔솔 뿌리면 완성되는 영양 만점 간식. 포장마차 사장님께서는 '우리 집은 설탕을 많이 안 쓰고 드레싱을 듬뿍 넣는다'라며 자부심 섞인 한 마디를 덧붙이셨는데, 정말이지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한 뒤, 기차 시간까지 호텔 라운지에서 한 숨 돌리기로 했다. 사실 틈틈이 처리해야 할 번역 일도 있었고, 작열하는 태양과 강행군에 꽤 지친 상태였다. 쾌적한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시원한 카페라테와 함께 업무를 보며 1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포장마차와 호텔 라운지는 유명 맛집도 명소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지금도 '부산의 추억' 하면 그날 그 장소가 떠오른다. 자칫 ‘보여주기 식’으로 변질될 뻔한 내 여행의 목적을 ‘쉼’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 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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