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에 걸린 아버지의 머릿속으로 떠나는 여행

XR 작품 - EMPEROR

by 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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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EROR>

실어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EMPEROR(엠퍼러)는 실어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40분 길이의 인터랙티브 VR 작품입니다. 감독인 마리옹 뷔르거(Marion Burger)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실제로 실어증에 걸린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연관 없어 보이는 단어들을 띄엄띄엄 말하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단어들이 사실은 그의 기억과 하나하나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관객은 그 기억의 실타래를 따라 아버지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한 인간을 이해하게 됩니다.



티저 영상을 먼저 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mhSsYsceuFM



서정적인 영상이 인상적이지 않나요? 이 작품은 202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XR 페스티벌인 New Images Festival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높은 완성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XR 씬에서 작품성 높은 작업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 짚기]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뉩니다.


아버지가 쓰러지던 날의 이야기

아버지와 함께 단어 연습을 하던 시간들

단어와 함께 펼쳐지는 아버지의 내면세계

아버지가 거실에서 어느 단어를 외치는 장면


이 중 세 번째 파트의 비중이 가장 큰데요, 단어를 매개로 다양한 시각적 메타포가 등장하고 환상적인 풍경이 이어집니다.


아버지와 단어 게임을 하는 딸


단어와 함께 펼쳐지는 무의식 중 아버지의 내면세계



아버지가 거실에서 소리치는 장면




[아트워크]


전체적인 아트워크는 흑백 영화에 차콜로 그린 듯한 질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략을 과감하게 하고 중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드러낸 덕분에, 이야기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되었어요. 마치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작업에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활한 배경 속에 최소한의 요소만 움직이게 하여, 과도한 연출 없이도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드넓은 평원 위로 새 한 마리만 날아간다 든지요.


상대적으로 많은 움직임이 사용된 부분은 딸과 함께 단어 연습을 하는 장면 속 딸의 동작, 그리고 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흑백 2D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장면들이 특히 공들여 표현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초반부에 썰매를 타고 설원을 내려가면서, 화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단순하면서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내면세계 속 딸과의 추억을 보여주고 있다. 물수제비를 하는 모습.





[인터랙션 짚기]


인터랙션은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손가락으로 사물을 일정 시간 이상 가리키면 선택이 되고,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거나, 손을 움켜쥐어 물건을 잡는 정도입니다. 핸드 제스처가 적용되어 VR 조이스틱 없이도 손으로 인터랙션이 가능합니다. VR 기기에 익숙지 않은 사용자들에겐 아주 유용하죠.

핸드 제스처가 적용되어 조이스틱 없이도 작품을 즐길 수 있다


VR 작품을 시작할 때 인터랙션 안내는 매우 중요한데요, 이 작품은 처음에 눈앞에 세 개의 문을 보여주고, 원하는 언어(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에 해당되는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도록 안내합니다. 일정 시간 가리키면 해당 언어가 선택된다는 것을 손쉽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담은 녹음기를 손가락으로 눌러 재생해 보기도 하고, 바닥에 박혀 파닥거리는 물고기 꼬리가 달린 와인병(?)을 꺼내 주기도 합니다.


물고기 꼬리가 달린 와인병을 잡아보자



딸과 함께 글씨 연습을 하는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손가락으로 열심히 철자를 써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써지지가 않아요. 머리와 손이 따로 움직이는 듯한 아버지의 감각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되어 단어게임을 해보세요




[인상적인 장면들]


집에서 딸과 함께 단어 연습을 하던 일상적인 장면이, 어느 순간 그 단어와 얽힌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전환됩니다. 마치 황폐한 유적지 같은 공간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찾아 헤매게 되고, 거대한 각설탕이 눈앞을 덮치거나 일상적인 사물이 비 일상적인 존재로 변하며 압도적인 스케일을 만들어냅니다.


집채만 한 각설탕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리고 성우이자 배우 올리비아 쿡(Olivia Cooke)의 목소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작품에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영어를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해 조금 슬펐습니다. 흑흑..


음악 또한 탁월합니다. 메이킹 영상을 통해 음악 제작 과정을 보면,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완성되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메이킹 영상 중 음악 제작 과정. 여러 악기로 다양한 실험을 했다고 한다.



[아쉬웠던 점]


체험할 때 만나는 모든 요소에 의미가 담겨 있을 텐데, 그 모든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보통 한 공간의 이야기가 끝나면 바닥에 보이는 무언가를 집어 들거나, 가고 싶은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면 바닥이 갈라지며 다음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어떤 공간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워, 한동안 헤매다가 뒤늦게 바닥에서 펄럭이는 새를 발견해 꺼내 주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간혹 전달하려는 메시지보다 ‘어떤 인터랙션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게임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비교적 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진입 장벽이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무리하며]


시끌벅적한 전시장에서 체험하다가, 집에서 혼자 조용히 체험하니 작품이 더 깊게 와닿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소리치는 장면이 이상하게 슬퍼서 계속 눈물이 났어요. 내용은 직접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VR 작품의 엔딩 크레디트에 감동 포인트가 있는데요, 바로 감독의 실제 영상입니다. 아버지와 엄마, 딸의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울컥해요. VR 작품들은 마지막 부분이 주는 감동이 늘 있는 듯합니다.


작가님과 아버지






[수상 경력]


EMPEROR는 수많은 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XR 작품의 경우 디벨롭 단계에서부터 상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 작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되며 다양한 상을 수상했고 여러 기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베니스 이머시브, SXSW, 깐느 이머시브, 시그라프 등등 엄청난 수상 기록
아틀라스 파이브, 프랑스 티브이, 피코 등 다양한 곳에서 프로듀싱을 했다.



현재 메타 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완성도의 작품이 유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료라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다소 의아하면서도, 관객으로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었어요. 강력 추천합니다.





감독 | Marion Burger & Ilan Cohen

성우| Olivia Cooke, Vimala Pons

시간 | 40분

언어| 영어/ 프랑스어 / 독일어

포맷 | 6 DoF Mobile VR


프로듀서| ATLAS V, FRANCE TV, PICO, REYNARD FILMS

스튜디오| ALBYON



영상 및 그림 출처

[1] https://astreaimmersive.io/full-line-up/emperor/

[2] 티저 유튜브 영상 캡처

[3] 비하인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1GM-Fwk8mEY






작업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께 EMPEROR의 메이킹 영상을 추천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GM-Fwk8m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