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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수 Dec 14. 2021

경주 고분 탐방기

#왕릉 아닌 기타 고분들

신라 천년의 사직을 담았던 경주에는 왕릉으로 불리는 고분들도 많지만 그 외 주요 인물들의 무덤과 밝혀지지 않은 수십 기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물론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대부분의 고분 중에서도 실제 피장자가 밝혀진 무덤은 몇 기에 불과하고, 지금까지 발굴된 금관총이나 천마총, 황남대총 같은 고분들은 거의 왕릉급 규모에 해당되기에 기타 고분들의 문화적 가치나 존재 의의도 왕릉에 비해서 그리 낮은 편은 아니다. 


먼저 거의 왕릉급 규모를 갖추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충효동 송화산 줄기의 전망 좋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큰 원형분으로 다른 고분과는 달리 평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24장의 호석과 돌난간 사이에는 바닥돌이 깔려 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영웅으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과 신라 왕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은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5대에 걸친 임금을 섬기며 위대한 업적을 남겨 훗날 흥무왕으로 추존되었다. 

태종 무열왕의 아들로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를 어머니로 둔 김인문의 묘는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앞에 있다. 문무왕의 동생으로 당나라와의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내어 백제와 고구려 정벌의 발판을 마련한 김인문은 여생을 당나라에서 보내다가 사후에 신라로 호송되어 경주에서 장사를 지낸 후 지금의 서악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김인문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식견이 넓어 훗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아들 김문왕과 더불어 자주 당나라를 드나들며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고구려 정벌을 위한 마지막 평양성 전투에서 신라군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함락하기도 했다. 한때 신라와 당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당에 의해 신라왕으로 내세워지기도 했으나 나당의 화해 후에 임해군으로 봉해졌다.

김유신과 김인문의 묘

경주 보문동 진평왕릉 인근에는 원효의 아들인 설총의 묘가 있다. 육두품 출신으로 요석 공주를 어머니로 둔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고 화왕계를 짓는 등 학문적 업적이 두드러져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 문장으로 꼽힌다. 명활산 동쪽 능선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설총 묘는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훗날 설 씨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상석과 묘비가 있고 주변은 철책이 둘러싸고 있다. 

지증왕의 증손으로 이찬 벼슬을 지낸 김후직의 묘는 경주 황성동 황성공원 북쪽 주택 단지 사이에 있다. 진평왕 재위 시절에 병부령으로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던 진평왕에게 충언을 고하였으나 듣지 않아 훗날 죽으면서 유언으로 왕이 다니던 사냥길 옆에 묻어달라고 해서 죽은 뒤에 왕의 사냥을 그만두게 했다는 말이 전해지며 일명 간묘라 부르기도 한다. 무덤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묘제는 횡혈 석실분으로 추정되며 무덤 앞에는 후대에 만든 상석과 묘비가 있다. 

설총과 김후직의 묘

일명 쪽샘이라고 불리던 경주 황오동에는 수십 기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었으나 대부분 도굴되거나 사라지고 현재는 10여 기의 고분들이 남아 있다. 월성의 북쪽이면서 황남대총을 비롯한 주요 고분군들의 동쪽에 자리 잡은 황오동 고분들은 외형상 원형 봉토분이며 단독 고분 2기가 맞붙어 있는 표형분이 존재하고, 서쪽의 대형 고분들에 비해 규모가 작고 수준 낮은 부장품들이 발견되어 신라 귀족들의 무덤들로 추정되는데, 돌무지 덧널 무덤 이전의 덧널 무덤과 다수의 초기 토기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3, 4세기의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초반에 발굴된 황남대총을 비롯한 대형 고분들이 즐비한 황남동 고분군은 대릉원으로 조성되어 보호받고 있다. 황남대총은 거대한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남분과 북분을 덧붙여 만든 표형분으로 각각 남성과 여성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금동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채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가 발견되어 천마총으로 명명된 155호 고분은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소지왕이나 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황남대총의 발굴에 앞서 준비 작업으로 먼저 발굴해 보았다고 한다. 

황오동과 황남동의 고분들

황남동 고분군과 인접한 노동동 고분군도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기적으로 움덧널 무덤과 돌방 무덤 사이의 5세기경에 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963년에 사적 38호로 지정된 노동동 고분군에는 규모가 큰 봉황대를 비롯하여 몇 기의 무덤 터가 남아 있으며 이 가운데 금령총과 식리총은 일제 시대 때 발굴을 통해 조사하였으나 봉황대는 아직 발굴을 시작하지 않고 있다. 

노동동 바로 인근에 조성된 사적 39호의 노서동 고분군에는 1921년에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과 1926년 일본 방문길에 경주에 들른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발굴을 참관한 서봉총이 있고, 그 외에도 호우총, 은평총, 쌍상총 등의 고분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은 인근의 다른 고분군과 같이 2011년 사적 512호 대릉원 일원으로 재지정되었다.

노동동과 노서동의 고분들

황남동 인근 인왕동에도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고분이 하나 남아 있다. 사적 42호로 지정된 인왕동 고분군에는 인근 고분군에 비해 규모가 작아 일찍이 도굴되거나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77년에 이 고분군의 지하에 소형 고분 20 여기가 발굴되어 조사되었는데 돌널 무덤과 독무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주 황성동 황성 공원 북쪽에 남아 있는 황성동 고분은 돌방 무덤으로 평지에 원형으로 파낸 자리에 점토를 깔아 기반을 조성하고 그 위에 축조하였다. 봉분의 기저에는 둘레돌을 둘렀는데 일반적인 둘레돌과는 달리 바닥에 냇돌로 된 기초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대형의 깬돌을 면석으로 놓으면서 봉분과 일체를 이루게 한 특징이 있다. 황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인물상의 복식으로 보아 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고분의 주인공이 들고 있는 홀로 보아 진골 이상의 왕족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왕동과 황성동의 고분

1986년에 발굴하여 조사한 경주 용강동 밭 가운데 있는 용강동 고분은 굴식 돌방 무덤으로 내부에서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신상이 처음으로 출토되어 신라 고분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순장이 금지된 후 토용을 넣어 무덤을 조성한 사실과 더불어 토용의 채색 옷을 통해 신라 복식의 재현에도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특히 청동제 십이지신상은 당나라의 무덤에도 발견되는 것으로 당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신라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구정동에는 신라 고분 중에는 유일한 방형분이 남아 있는데 이미 도굴당한 후인 1920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가 밝혀지고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196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의 평면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된 토분으로 봉분 아래에 호석을 설치하였으며 3단으로 쌓은 면석에 무사의 복식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겨 놓았다. 유일한 방형분으로 계통을 정하기는 어려우나 고려 초기 네모 무덤의 선구적 형태를 보이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용강동과 구정동의 고분

옛 선조들이 남긴 고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주요한 통로이자 조상들의 혼이 담긴 성스러운 공간이다. 신라 천 년의 사직을 거치면서 수많은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경주의 고분들을 탐방하는 뜻깊은 시간을 통해 선조들의 행적과 영욕의 흔적들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번 탐방 시리즈에 담지 못한 경기도 포천의 경순왕릉과 그밖에 알아내지 못한 고분들에 대한 후기는 다음으로 미루면서 신라 왕릉과 경주 고분들에 대한 탐방기를 모두 마친다. [Dec 10. 2021]


[신라 왕릉 탐방기 1]  https://brunch.co.kr/@saebawi/61

[신라 왕릉 탐방기 2] https://brunch.co.kr/@saebawi/70

[신라 왕릉 탐방기 3]  https://brunch.co.kr/@saebawi/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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