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을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건을 꼽자면, 우리 부부가 살고 있던 집의 처분이다. 내 배우자의 영국행이 결정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그때만 해도 부동산 시장이 지금과 같이 얼어붙기 전이라 많은 옵션들을 추천받았다. 첫 번째로는 집을 팔고, 전세를 껴서 상급지로 가는 것, 두 번째로는 전세를 받아 송금해서 영국에서 다른 부동산을 취득하는 것, 마지막으로 월세를 주는 것이었다. 영주권을 취득하고 영구적으로 이주하는 것이 아닌 이상 거액의 외화반출이 불가능했기에 두 번째 안은 바로 기각이 되었다. 세 번째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이는 영국의 월세가 비싸 나름의 현금흐름의 확보가 필요해서다. 결국 지난 주말 세입자를 위해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우리 부부의 흔적을 비워냈다.
집에서 살면서 누린 많은 것들
세입자가 원하는 가전제품과 가구를 제외한 내구재들은 내 배우자의 본가에-농장이 있기 때문에 큰 창고도 있어서- 출국할 때 가져가야 하는 짐은 나의 본가로 가져가기로 했다. 농장의 큰 창고 안에 코스트코에서 파는 가건물 같은 창고를 설치하고, 그 안에 우리의 짐을 켜켜이 쌓아놓았다. 창고 옆에는 염소 축사가 있어서 흑염소 두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고, 창고 안 쪽에는 빛이 잘 들지 않아, 짐이 쌓여있는 어수선한 모습은 마치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능묘의 전실 같아 보였다. 비록 그만큼 값나가는 물건은 없었지만.
시골에서 짐 정리를 끝내고, 서울로 와 조금 남아있는 짐을 정리했다. 떠나기 전, 온전한 우리의 집으로 방문하는 마지막 길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산꼭대기의 버스 정류장에서 아파트 단지로 내려오는 오솔길은 꼭 조규만의 '산책할까요?'와 꼭 어울리는 곳이라 좋아했다. 옆 동을 지나갈 때 틈새로 슬쩍 보이는 인왕산의 압도적인 자태는 늘 감동적이었다. 뒷산에는 정말 끝내주는 트레킹 코스가 있고, 경복궁 담벼락을 한 바퀴 도는 조깅코스를 당연하게 누려왔다. 책을 사고 싶으면 광화문 교보로, 영화를 보고 싶으면 씨네큐브에 가서 고상한 척을 했다. 남은 쓰레기를 대형 폐기물 봉투에 담아 버리러 가니, 우리 부부가 신혼에 샀던 소파가 비 맞은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저 소파에서 자는 낮잠은 얼마나 달콤했나? 이 집을 살 때 얼마나 설레었으며, 이곳을 꾸미기 위해 고양 이케아를 얼마나 들락거렸나? 지나고 보니 행복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이었다. 이사한 지 4년이 지났어도 깔끔하고 환한 집과 두고 가야 하는 즐거운 생활들을 생각해보니 이 나이에 타국에서 왠 사서 고생일까 하는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을 뵙고 저러한 감상을 말씀드렸다. 과연 15년 직장생활과 여의도에서 자연스레 생긴 많은 인프라와 멀쩡한 집을 놔두고 해외에 나가는 게 맞을까? 교수님은 많은 현대문화가 영국에서 발원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가서 보고 듣는 게 많을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당신께서는 본토에서보다 아일랜드에 머무른 기억이 오래 남으셨는데, 아일랜드에도 새뮤엘 베케트나 제임스 조이스처럼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학가들이 많은 데다가 정서적으로도 맞아서 좋았다고 하셨다. 문득, 처음 영국에 가기로 결정을 하면서 이것저것 하고 싶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가면 마르타 아르헤리치나, 람슈타인의 공연 보기를 마음먹기가 더 편할 것 아닌가? 여기의 생활을 정리하느라 너무 과거에 매몰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내 나름의 생활기반을 가져보기 위해, 석사를 지원하기로 했다. 독특하게도 영국의 대학들은 오프라인에서 발급한 졸업증명서와 성적표를 요구하는데 이를 떼기 위해 몇 주 전에 모교들을 방문했다. 학사와 석사를 다른 학교에서 했지만, 두 학교 모두 지척에 있기에 그냥 학교를 방문했다. 학부 학교에서 석사 학교를 찾아가는 데 몸이 기억하고 있는 지름길을 자연스럽게 찾아가고, 이맘때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휘경동, 청량리동을 아우르는 구역이 나의 또 하나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도 고향과 같은 편안함을 찾게 될 것인가? 살다 보면 그곳이 또 다른 나의 고향이 될까? 40대에 접어드는 지금 20대 때처럼 막연한 낙관적인 기대는 없다. 그저 그곳에서도 마음 붙일 무언가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