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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Aug 05. 2020

비틀스와 고양이

면접에서 떨어진 날이었다. 이태원 사거리를 지나, 잠수교 쪽으로 걷고 있었다. 11월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이태원의 이질적인 불빛을 등지고 걸으니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녹사평대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퍽’! 교통사고가 났다. 고양이 한 마리가 우회전하는 차에 치였다. 고양이는 절룩거리며 몇 발작을 걷더니 보도 위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차는 이미 가버렸다. 뺑소니.


나는 고양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고양이 머리 뒤쪽에서 피가 흘렀다. 죽은 듯했다. 끔찍하고 불쌍했다. 죽은 고양이를 마주하니 무섭고 징그럽기도 했다.


그때였다. 한 여자 애가 다가왔다.

“죽었나요?” 다짜고짜 그녀가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고양이 목덜미에 손을 댔다. 생사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에게 손을 대다니, 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병균이 옮을 것만 같았다. 그보다 시체를 만진다는 게 끔찍하게 여겨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일까?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고양이에게 덮어주었다.


“저, 옷에 피가 묻을 거예요.” 난 놀랐다. 자신의 깨끗한 옷을 길냥이에게 희생하다니.

“괜찮아요.” 상관없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익숙해 보였다. 익숙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 같았다. 10여분이 지나자 ‘공무수행’이라고 적힌 트럭을 타고 남자 둘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삽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 삽으로 고양이를 뜨려고 하자, 그녀는 그를 제지하였다. 자신의 옷으로 감싼 고양이를 직접 팔로 안아 들더니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비닐봉지에 담았다.

 

“고양이는 어디로 가는 거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 그녀가 형식적으로 물었다.

“일단 서빙고동에 있는 동물 사체 보관소에 보관됩니다.” 공무원이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아,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무언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공무수행' 차량이 떠나자, 그녀는 재킷을 몇 번 털고는 되돌아가려고 했다. 순간 그녀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위대해 보였다. 솔직히 그 순간 난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존경했다. 멋있었다. 술을 마셔서가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그도 나와 똑같이 그녀를 사랑했으리라. 온 우주에 그녀만이 존재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혹시, 김민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돌아봤다. 그래, 난 이미 그 애를 알고 있었다. 아는 애였다. 바로, 우리 반 왕따였던 김민지.


아침 조회 시간이었다. 우리는 중학생답게 교장 선생님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날 싸온 도시락을 언제 까먹을지 따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따분했고 평화롭고 맑은 5월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한창 안드로메다로 향할 때 즈음, 갑자기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었다. 마비 때문인지 온몸을 떨었다. 간질이었다. 의학용어로 '뇌전증'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간질'로만 알았다. 그게 어떤 병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또 왜, 언제 발작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조회는 중지되고 아이들은 모두 교실로 이동했다. 한참 후 하얀색 차가 '삐뽀, 삐뽀' 소리를 내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왔다. 

엠뷸런스에 실려간 애가 바로 김민지다. 민지는 늘 조용했다. 있는 듯, 없는 듯.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결석이 많았다. 진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운 듯했다. 아이들은 민지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다. 워낙 조용해서 친한 애가 없기도 했지만, 그 사건 이후 아이들과 민지 사이에 불편함과 어색함, 그리고 서먹한 공기 같은 것들이 가로 놓여 있었다.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해 12월 겨울이었다. 기말고사도 끝나고 크리스마스와 겨울 방학을 앞둔 행복한 나날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 번호를 불러 무작위로 노래를 시켰다. 이이들은 처음에는 쭈뼛거렸지만 노래를 곧잘 불렀다.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가요를 불렀다. 아이들은 경청하기도 하고 따라 부르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그때 민지의 번호가 불렸다. 민지는 한참을 망설였지만, 선생님의 독촉으로 겨우 교탁 앞에 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워낙 조용한 아이라서, 과연 노래를 할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무슨 노랜 줄 몰랐다. 가만히 듣다 보니 영어였다. 갑자기 교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웬 영어 노래야?”, “대체 뭔 노래야?”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노래였다. 조용한 멜로디가 있는 노래였다. 민지는 아이들의 웅성거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조용하라는 뜻으로,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잠시 후 교실이 조용해졌다. 민지의 작은 목소리가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멜로디가 아름다웠다. 민지의 노래는 창가에 비치는 햇살 아래 잠든 고양이 같았다. 교실 커튼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어느새 민지의 나긋한 목소리가 우리의 머리를 따뜻하게 짚어주었다.

민지가 부른 노래는 비틀스의 'Let it be'였다. 난  'Let it be'를 민지를 통해 처음 들었다. 내게 비틀스는 민지였다. 비틀스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민지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구석에서 늘 혼자 조용히 있던 아이가 불러주는 비틀스는 엄청난 감동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통해 한 층 더 성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난 민지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 같았다. 


'Let it be'를 부르던 중학생의 민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천사가 되어. 어쩌면 인생은 자신의 사금파리를 찾아 헤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홀든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충분한 제반 조건이 된 상태였다. 누군가 불씨만 댕기면 바로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민지와 함께 바다를 건너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강렬하게 들었다. 달빛 아래 서 있던 민지를 사랑했다. 그땐 분명 그랬다. 그녀와 함께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았다. 세상에서 한발 벗어나 더 넓고 더 크게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분명 경이로움이고 끝없는 행복이리라. 


"김민지 맞죠?" 

“누,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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