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Aug 25. 2023

도둑들 1

내 인간애를 파괴한 집시 모녀

가게에 출근해 크게 변할 것이 없는 울타리의 일과 속에서 가끔 나타나는 도둑들은 나의 매너리즘을 깨부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얼굴에 ‘나 도둑’이라고 쓰여있지 않으니 가게에 들어와 구경하는데 바로 옆에 붙어 감시를 할 수도 없고, 또 대체로 그들은 잘 차려입거나 언변이 화려해 웃으며 대화하다 뒤통수를 맞는 격이지요. 한국에는 곳곳에 cctv가 있어 도둑이 많이 사라졌고, 또 사건이 발생을 해도 경찰이 잡으려 애를 쓰는 반면 아직 많은 것들이 아날로그인 데다 cctv가 흔하지 않은 프랑스에서 경찰은 도둑을 잡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제 도둑놈이 오늘의 도둑놈으로, 또 내일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앞날이 창창한 도둑놈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가게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몇 달 전에 와서 혼을 빼놓고 물건을 훔쳐간 모녀가 부푼 꿈을 안고 다시 가게를 방문했었죠. 처음에 난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이 800유로에 달하는 옷들을 훔쳐간 후에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깨달았던 거예요. 그 순간은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흐르는 가운데 시간을 초월한 무(無)의 상태로 뇌가 일순간 정지되었다가 번개를 맞고선 정신을 차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는 어떤 물건이 얼마나 없어졌는지 확인한 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뇌의 작용으로 가게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합니다. 이럴 수는 없다, 내가 착각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들이 나가는 걸 보면서 인사까지 했는데 이렇게 내 인간애를 파괴할 순 없다. 그러나 아주 프로페셔널한 도둑이었던 그들은 내 인간애를 산산조각내고도 모자라, 모든 인간을 의심하게 만드는 불씨를 마음에 심어주고야 말았습니다.


도둑 모녀는 집시였어요. 당시엔 어떤 얼굴이 집시인지 전혀 구분을 하지 못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꽤 특이하게 입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을 했지요. 집시건 누구 건 간에 가게에 와서 둘러보고 또 물건을 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요? 되레 짐작해 사람을 의심하고 볼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걸 순진하고 멍청했던 내가 몇 번의 도둑놈들을 경험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집이 없고, 돈은 더 없는 집시들이 가게에 와 비싼 옷을 살 리는 만무한 일이라는 걸, 아프리칸 아저씨가 한국 옷을 파는 가게에 와서 와이프 준다며 옷을 사는 일은 거의 없을 일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게 되었죠.


집시 모녀는 옷걸이에 옷과 액세서리가 매치된 상태 그대로 몇 벌씩이나 훔쳐갔어요. 나가기 직전 그들이 내게 했던 행동을 잊지 못해요. 정신없게 말을 걸더니 갑자기 “Regardes derrière!” 네 뒤를 봐! 하고 말했죠. 내가 우둔하게 뒤를 돌아보는 아주 잠깐의 사이에 그들은 인사를 하고 떠났어요. 기분이 이상했어요. 설명할 순 없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옷은 없고 옷이 걸려 있던 공중에 대롱거리는 낚싯줄 고리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서 말했듯 고요한 무(無)의 시간이 지나간 후 곧이어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이 나를 후려쳤어요. 두 번이나 당했다, 그것도 무려 800유로야.

한국에 있는 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할 수 없지 뭐. 옷걸이가 너무 아깝다.”라고 하십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그대로 가게 문을 닫고 근처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이전 07화 최초의 블랙리스트, 마담 나탈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