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Aug 13. 2023

최초의 블랙리스트, 마담 나탈리

그녀와 친해지는 법

키가 작아서 늘 플랫폼 힐을 신고, 어깨 중 한쪽은 주로 노출이 되는 옷을 선호하며, 곱슬의 다갈색 커트머리에, 고양이 같은 눈을 가진 나탈리라는 여자가 있어요. 가게에 와서는 쫓기는 사람처럼 서두르면서 두 시간씩 있고, 그 시간 동안 나를 옆에 세워두고 자신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나를 비관에 빠지게 만드는 여인.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한 게 문제였다면,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으면서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 사람을 들들 볶으며 에고의 상태로 몰입하는 그녀를 나는 나탈리스트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조금 더 해볼까요?


옷을 사면 반드시 바꾸러 오는 여인, 물론 입었던 옷도 바꾸러 오는 대단한 염치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피팅룸에서 위아래 망사 속옷만 입고 나와 가게를 활보할 수 있는 담대함을 지닌 그녀, 가게 최초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마담 나탈리는 우리 가게의 오랜 단골손님입니다.


몇 년 전, 그녀가 가게에 와 옷을 하나 사면서 말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서 이 가게에서 옷을 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요. 속으로 너무나 잘 되었다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다시 일을 구하면 또 올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요.

네, 마담 나탈리는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재취업에 성공하여 가게에 다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나는 굳게 다짐했어요. 그녀에게 옷을 팔지 않겠다고요. 입었던 옷을 바꾸는 건 물론이고, 수선집에 옷을 고칠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하니 옷을 가져갔다가 다시 오겠다는 불가능한 것들을 자꾸 요구하는 그녀에게 나를 비롯하여 사장님과 가게의 다른 동료도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거든요.


나는 마담 나탈리의 모든 질문에 미소 띤 얼굴로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대답만을 골라서 하기 시작했어요.


"이 바지 어때? 요즘 내가 살이 쪄서 바지가 잠기지는 않지만, 다이어트를 하면 입을 수 있을지도 몰라."

"바지 길이도 너무 길고, 다이어트가 어디 그리 쉽나요..."


"이 드레스는 어때? 뚱뚱해 보여? 키가 너무 작아 보이나? 어깨가 좀 더 파져야 되겠지?"

"키도 작아 보이는데, 문제는 좀 뚱뚱해 보이네요. 안 어울려요. 이렇게 말해서 죄송한데 안 사시는 게 낫겠어요."


우리의 대화는 그녀가 가게에 있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어요. 나는 정말로 그녀에게 옷을 팔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담 나탈리가 결국 오랜 시간 끝에 고른 옷을 계산하면서 내게 그러더군요.


"재이, 난 네가 정말 좋아. 넌 진짜 솔직한 판매원이야. 다른 가게에 가면 물건 팔려고 죄다 예쁘다 소리만 한다고. 근데 넌 정직해. 사장한테 네가 좋다고 이야기해야겠어."


이건 내가 기대한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었어요. 나는 이 손님을 가게로부터 떨쳐내고 싶었죠. 너무도 기분 좋게 돌아간 마담 나탈리는 몇 주 후에 또 나타났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일하면서 스트레스는 받지 말자 싶어 그녀를 이웃집 언니 정도로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죠. 마담 나탈리는 다른 프랑스 마담들에 비해 오만하게 굴지는 않는구나, 오히려 내가 한 이야기를 잘 듣고 오래 기억하는 편이었죠. 내가 어쩌다 불어와 영어를 섞어 말해도 영어를 써도 된다며 자신이 미국에서 석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나탈리. 고약하고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지만 밉상은 아닌 그녀.


그간 내가 손님들 앞에서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에 가게를 비롯해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더 힘겨웠던 건 아닐까. 

매일 나를 잃어가는 것 같은 조급함, 나를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에 더 잘하려고 애쓰던 것들이 내게 도리어 생채기를 내지 않았나. 


마담 나탈리가 가게 유리문에 나타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아무리 이웃집 언니처럼 대해보겠다 마음먹어도 그녀는 우리의 블랙리스트이니까요. 다만 그녀 덕분에 '될 대로 돼라'의 미덕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았네요. 한 뼘쯤 더 자란 내가 가게에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겪어야 비로소 내가 내 나이의 사람으로 이 나라에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걸까요. 아직 나는 아이 티를 풀풀 내는 불완전한 어른아이로 퐁토슈 가에서 새 삶을 시작했을 뿐인데 말이에요.





이전 06화 친애하는 나의 손님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