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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Aug 02. 2023

이웃들

나를 버티게 하는 건 결국, 사람

퐁토슈 가에서의 내 자리가 점점 커다란 동심원을 그려갈수록 이웃들과의 관계도 더 자연스러워졌어요. 퐁토슈 가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코딱지만 한 아랍마트 아저씨와도 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죠. 지금은 사라져 버린 샌드위치 가게의 이태리 아줌마는 또 얼마나 정겨웠는지요. 처음 그 아줌마를 봤을 때 말도 어눌하고 어딘가 모르게 사나운 인상을 받았어요. 마치 갱년기 절정에 달해 더 이상의 인내심이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의 사람처럼요.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점심을 사러 그 가게에 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아줌마에게 물었어요.


"혹시 이태리 사람이세요?"


그제야 아줌마는 이태리인 특유의 제스처를 보이며 자신을 이태리 사람으로 알아본 건 내가 처음이라고 반가워하셨어요. 그 후로 아줌마는 내게 공짜 케이크나 쿠키 등을 주곤 하셨죠.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일까, 말은 어눌한데 손님들은 자꾸 뭘 물어보고, 세상만사 짜증이 나 죽겠는 마당에 어떤 애가 내게 물어요.

"혹시 한국인이세요?"

오, 중국인, 일본인 모두 건너뛰고 한국인이라니. 그럼 나도 아줌마처럼 활짝 웃으며 공짜 옷을 줄 수는 없을지언정 약간의 할인 혜택을 줘보자고 다짐을 해 봅니다.


프랑스인 남편을 따라 여기서 살고 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이민자, 이방인의 신분이기에 그런 자들이 어떨 때에 좌절하고 또 어떨 때 위안을 받는지 잘 알고 있지요. 이태리 아줌마가 내게 준 공짜 케이크들은 한국을 생각나게 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자주 들러 온갖 것들을 사 먹고 또 얻어먹고 했지요. 마음의 허기를 그렇게 채우고, 대신 나는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기에 이릅니다.


그런가 하면 성질 더러운 잭 러셀 테리어 두 마리를 키우는 인쇄소집 남자는 어떤 날엔 반갑게 인사, 또 다른 날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을 정도로 얼굴을 마주치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쌩하게 지나갔죠. 그러니 이 남자를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생각이 많아졌어요. 저 멀리서 인쇄소집 남자가 보이면 인사를 먼저 해야 해 말아야 해, 얼굴을 한번 쳐다봐야 해 말아야 해 하고 괜히 조바심이 났죠. 그러다 나는 알게 되었어요. 인쇄소집 남자는 손에 맥주병을 들고 있을 때에 친절하다! 맥주를 마셔야만 그의 사회성이 되살아나는 걸까요.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집에 혼자 두기 불쌍해 데려온 나의 개, 데이지가 함께 있었죠. 데이지가 가게 쇼윈도에 붙어 꼬리를 흔들고 있길래 바깥을 보니 인쇄소집 남자가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데이지를 향해 한껏 미소 지으며 아기 다루듯 까꿍 뭐 이런 걸 하고 있지 않겠어요.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남자를 쳐다보자 마치 우리가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그러나 황당한 감정도 잠시, 프랑스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이게 그리 황당할 일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들은 원래 이런 것이었죠. 본인들의 감정이 우선이고, 그래서 인사를 하기 싫으면 안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날 어떤 일로 인해 짜증이 나면 짜증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거죠. 내가 볼 땐 세 살 먹은 아이 같고, 지독한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 같았지만 그대로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나니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게 한결 쉬워졌어요.


그리하여 나도 프랑스 사람들의 필터링 없는 날 것의 성질머리를 고대로 배워 행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다니엘 아저씨에게 배운 온갖 욕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죠. 오래 묵은 마음속 화병이 점점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자신에게, 오직 자신에게만 이로운 프랑스인 특유의 습성이므로 다른 나라에 가서는 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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