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Aug 26. 2023

도둑들 2

대환장의 경찰서행

지도에서 검색을 해 마레 중심에 있는 경찰서로 향했어요. 걸어도 될 만한 거리였지만, 마음이 다급하고 화가 나 택시를 탔죠. 그게 택시를 타야 할 합당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택시를 타는데 또 이유란 게 필요한 일은 아니니까요. 가까운 거리를 가는데 비싼 택시를 굳이 탔던 자신에 대한 변명을 이렇게도 길게 해 봅니다. 물론 택시는 기약 없이 막혔습니다.


도착한 경찰서 입구에서 내가 온 이유를 물었어요. 나는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도둑을 맞았다고 했더니, 경찰관이 심드렁하게 무슨 가겐데? 합니다. 옷을 파는 부티크고, 도난당한 물건의 가격은 800유로 가까이 된다고 하니 그제야 나를 제대로 쳐다보는 경찰관. 그러나 이곳에서 도난 사건은 처리하지 않는다며 다른 경찰서로 가라고 합니다. 도난 사건을 다루지 않는 경찰서가 있다니, 안 그래도 화가 난 나에게 더운물을 끼얹는가 싶더니 이어 "너 불어 잘하는데!"라며 깔깔 웃습니다. 미친 것이 아닐까 저 경찰관은.

언젠가 바스티앙이 한 말이 기억나요. 프랑스 정신병원엔 환자들로 가득 차서 미처 가지 못한 자들이 길에 널려 있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또 한편 내가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불어를 경찰관이 잘한다고 추켜 세워주니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와중에도 잠깐 우쭐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열 뻗쳐 모드로 돌아와 그럼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어요. 경찰관은 근처 조금 더 큰 경찰서로 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막힐 걸 알았지만 또 택시를 탔어요. 도착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나를 경찰서 안으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아, 드디어 나도 경찰서에서 문서 작성 같은 걸 해보는구나 하고 은근히 설렜지요. 내 이야기를 들은 경찰관은 내가 도난 신고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오직 가게의 사장이 와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아니, 내가 이 일을 겪었고 사장은 한국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보험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아니, 나 인상착의도 다 알고 심지어 가게에 두 번이나 와서 훔쳐간 사람들인데, 아니, 무엇보다 내가 직접 겪었는데 왜 안 되냐고. 답답한 마음에 한국인 특유의 "아니"만 속으로 열심히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인 사건이 난 것도 아니고, 단순 절도에 피해액 계산해서 나중에 보험 처리하면 될 일을 굳이 경찰이 나서서 도둑 잡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시위대를 막으러 나간다면 모를까 도둑을 왜 잡겠습니까. 파리를 소매치기의 최상위권 안에 들게 할 미래의 꿈나무들에게는 방임이 최고의 약일 텐데요.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터덜터덜 가게로 걸어왔습니다. 허비한 내 시간과 택시비가 너무 아까웠어요. 하지만 또 인생이 그런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다 좋은 일이 생기면 다행한 일이고, 보통은 불만족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고요.

돌이켜보면 프랑스에서 나는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원했던 직장,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 등의 지원에서 모두 떨어졌으니까요. 에이 별 일 아니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친한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원해서 끝까지 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더라고요. 어쩌면 나는 아주 절실하게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싶지 않았을지도, 그런 의지가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 내 나라에서의 실패와 이곳에서의 실패는 와닿는 정도가 너무도 달랐습니다. 사소한 실패에도 저어기 밑바닥까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기분, 쉽사리 회복이 되지 않는 감정들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 깊은 우울로 빠져들었던 날들이 있었어요.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이었다면 경험하지도 않았을 일들에 노출이 되고 사람들과 지겹도록 부대끼는 동안 마음에도 어느 정도 딱지가 앉는 것 같았습니다.


경찰서에서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면서 이 나라 경찰들의 무능과 제로에 수렴하는 그들의 성의를 생각했어요. 나는 어쩌면 내 가게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둑이 들었던 것에 더 분노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책임을 다 못한 것만 같은 죄책감과 미안함에 말이에요. 그리하여 나는 집시 모녀가 내게 심어준 인간들에 대한 불신의 불씨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은 활활 타올라 급기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마는데요...





이전 08화 도둑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