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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Aug 28. 2023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

미국 관광객을 쫓아갔어요.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 같은 게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거기에는 이를테면,


•8구, 샹젤리제 대로의 속옷 가게 : 귀가 어둡고 동작이 굼뜬 나이 많은 마담 상주, 레벨 하.


•1구, 생 오노레 가의 향수 가게 : 눈을 고양이 같이 뜨고 미소로 맞이하는 젊은 직원 상주, 가짜 미소에 속지 마시길. 레벨 상.


•3구, 퐁토슈 가의 옷 가게 : 불어 잘 못하는 아시안 상주, 말귀 잘 못 알아들어서 아무 말이나 해도 웃음. 레벨 최하.


이런 게 도둑들 사이에 존재해서 나를 세상 쉬운 호구로 알고 가게에 드나드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아휴 도둑놈님들 어서 오세요. 마음껏 훔쳐가시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 정도의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던가 하고 말이죠.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과 특이한 모카신을 신은 모녀가 가게에 왔습니다.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옷에 대해 질문을 하던 순간, ‘아, 저번에 왔던 집시구나!’ 하고 알 수 있었죠. 저 공동(空洞)과도 같은 새카만 눈, 마음이 읽히지 않는 저 눈을 밤마다 떠올리며 나는 얼마나 많은 이불킥을 했던가.


그간 친구들과 남편으로부터 도둑이 들어왔을 때에는 소리 지르거나 같이 싸우지 말고 조용히 나가게끔 유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특히 나를 잘 아는 남편은 걱정을 많이 했지요. 평온하다가 갑자기 폭주하는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요. 도둑이 다시 찾아와 해코지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집시 모녀 곁에 작정을 하고 붙어 서 있었어요. 질문을 해도 시큰둥, 잘 모르겠다, 너한테 팔 옷은 없어라는 식의 태도로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죠. 그제야 깨달은 것 같았어요. 자신들의 호구가 드디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구나. 집시 모녀는 하는 수 없이 가게를 나갔습니다.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사진으로 몰래 남겼어요. 그들은 가게 맞은편에 주차 한 아주 오래되고 낡은 파란색 자동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파란 자동차는 떠났으나 이번엔 아프리칸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인생은 마치 난 절대 너를 쉬운 길에 놓아두지 않겠다, 시험하고 또 시험해 네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겠다 하는 태도로 나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았죠.

우리의 듬직한 아프리칸 아저씨는 낡은 영국산 바버 재킷을 입고 네모난 서류 가방을 들고 가게에 들어왔습니다. 아프리칸 아저씨가 한국옷을 파는 가게에 오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죠. 게다가 와이프 옷을 산다고 합니다. 제가 본 파리의 아프리칸 마담들은 아프리칸 패브릭으로 만든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과 프랑스 여자들이 입는 옷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죠. 하지만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에 의하면, 퐁토슈 가의 아시안 판매원은 미처 버리지 못한 인류애와, 인종차별은 나쁘다는 공식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미소와 친절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칸 아저씨는 물건을 훔쳐 떠나갔고, 몇 주 후엔 그의 친구까지 데리고 다시 가게에 나타나고야 말았는데요.


두 명의 건장한 아프리칸 아저씨들이 가게에 들어오는 순간, 가게에는 나 혼자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훔쳤던 가게에 친구까지 데려와 또 물건을 훔쳐보겠다는 일말의 양심도 찾을 수 없는 인간들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나는 친구와 남편의 당부를 생각하며 침착하게 말했어요. 일이 있어 가게 문을 급히 닫아야 하니 나가달라고요. 몇 번 종용하듯 말하자 그들은 순순히 가게를 나갔습니다. 만약 내 손에 프라이팬이 있었다면 그들의 등짝을 내리쳤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옷 가게에 프라이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고요, 대신 나는 핸드폰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찍었습니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나는 이웃 식당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안아주며 따뜻하게 위로하는 내 이웃들. 퐁토슈 가의 사람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게에 오는 손님을 잠재적 도둑으로, 지하철에서 지나치는 무수한 사람들을 소매치기로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마음에 빠르게 금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가게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특히 미국인 관광객이 드나들었어요. 언제나 쾌활하고 밝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을 잘 사는, 내가 가장 반기는 미국 손님들이 오면 그날은 운수가 좋은 날이었지요.

어느 날 미국인 가족이 가게에 들어와 다양한 액세서리들을 착용해 본 후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갔어요. 가게를 정리하다가 스카프 하나가 없어진 걸 깨달았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차분하게 찾았을 테지만 이미 나는 너무도 피폐해진 상태로 “도둑 너 새끼 걸려만 봐라.” 하는 마음이었지요. 의심이 확신이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나는 가게 문을 잠그고 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웃 카페에 가서 이런 사람들을 보았냐고 묻고, 반 정신이 나간 상태로 퐁토슈 가를 걷다가 마침내 관광객이 많이 들르는 편집샵에 들어갔지요. 편집샵의 세큐리티 아저씨에게도 물어보고, 도둑이 많아 어쩌냐고 함께 한탄을 하는 중 미국인 가족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세큐리티 아저씨가 옆에서 “에이 이 사람들은 아니야.”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떨리는 숨을 고르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착용했던 스카프를 도저히 못 찾겠는데 어디다 두었냐고요. 당황하며 자신의 가방을 움켜쥐는 미국인 여성, 심증이 확증이 되는 순간. 어디 두었다 말은 안 하고 여태껏 자신을 따라온 거냐고 질책합니다. 스카프가 없어져서 물어보려고 당신을 찾았다는 빈곤한 대답을 하며 나는 혹시 그 가방 안에 있는 것 아니냐고 마지막 타격을 가합니다. 미국인 여성은 절대로 가방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힘껏 움켜쥐는 가운데 갑자기 그녀의 딸이 말해요. 그 스카프 무슨 요람 같은 데다 걸쳐둔 것 같은데… 더 나갔다가는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대충 알았다고 하고 가게로 돌아왔습니다. 가게에는 빈티지 아기 요람이 있었는데, 스카프를 착용해 본 손님이 아무 곳에나 던져 놓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였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그저 “오 마이 갓”만 반복했고요, 엄마는 “그 사람 파리 여행 망쳤네.” 그러면서 혹시 고소당하는 거 아니냐고 나를 걱정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그 손님이 찾아올까 봐 며칠 동안 긴장이 되기까지 했어요. 그리곤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생겨도 쫓아 나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요.


이 자리를 빌려 당신의 파리 여행을 망친 일에 대해 사과합니다. 당신을 도둑놈으로 의심해 미안합니다.

나는 이렇게 퐁토슈 가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성장인지 퇴보인지 모를 일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는 이제 이렇게 정정되어야 합니다.


•3구, 퐁토슈 가의 옷 가게 : 불어 못하는 아시안 판매원 상당히 개화됨. 눈치도 빨라짐. 더 이상의 도둑질은 불가하다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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