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Aug 30. 2023

이네스의 죽음

그리고 다니엘 아저씨의 새 강아지

어떤 때에는 자잘한 사건사고 하나 없이 조용한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파리의 패션위크와 큼직한 행사들이 지나가고 나면 밤의 길이는 어느새 발목까지 늘어나 있었어요.

센느 강변의 춤바람 난 사람들, 사랑과, 땀과, 온갖 사기(詐欺)와, 너와, 나의... 한 계절의 모든 열기는 길게 내려온 밤의 자락에 함락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약간은 메마른 얼굴로 축축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을 견뎌야만 하는 거예요. 그것은 가로등을 밝힌 밤의 테라스와 노란 실루엣을 얹은 센느 강 앞에서 눈물을 흘릴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말입니다. 길에는 배고픈 개와 추운 노숙자가, 그리하여 집이 없는 자와 있는 자들 사이의 공백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밝고 어두운 것들의 대조가 더욱 뚜렷해지는 그런 잔혹한 계절이 오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 계절의 가운데, 퐁토슈 가의 연로한 이네스는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던 이가 마저 빠지고, 발톱도 통째로 빠져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아저씨는 이네스의 발을 붕대로 지혈하고 개 배변 봉투로 감싸는 웃지 못할 정성을 보이셨죠. 이네스를 보면 늙는 게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이빨과 발톱을 상실한 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생존 능력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죠. 털은 엉키고 푸석푸석하며, 눈빛마저 흐리멍덩해진 이네스에게 다니엘 아저씨는 아무래도 알츠하이머가 온 것 같다고 합니다. 배변 실수를 자꾸 한다고요. 그럼에도 이네스는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인간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애를 썼어요. 오히려 그 정도가 더 심해졌죠. 이가 없어 먹기 힘든 비스킷을 지미에게 질 새라 기어코 먹고야 말았고, 자꾸만 들이대는 냄새나는 몸을 쓰다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끔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저씨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네스를 저렇게 넝마 같은 상태로 두는 이유를요. 제대로 깎이거나 빗질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로 비 오는 거리를 쓸고 다니니 유기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지요.

열다섯의 이네스는 빠르게 달라져갔어요. 사람에 대한 집착을 놓았고, 얼굴을 떨고, 눈은 아예 생기를 잃었습니다. 텅 빈 눈을 보고 있으면 죽음은 그 안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냥 검고 불투명한 공간.

부모님이 키우시던 내 첫 개가 죽었을 때, 나는 며칠을 눈이 퉁퉁 부어 떠지지도 않을 정도로 울었지요. 내가 내 개에게 잘못했던 것과 앞으로 더 해주지 못할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이고, 내 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었죠. 내 개가 죽고 몇 년이 흐르자 소중했던 개의 존재감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마음에 남았지만, 그 개와 함께했던 많은 기억들이 알록달록한 셀로판 상자에 쌓여 점차 그 투명성을 잃어갔습니다. 시간은 사건을 희석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었죠.


이네스는 그 해에, 밝고 어두운 것들의 대조가 더욱 선명해지던 시기에 죽었습니다. 작고 까맣고 누더기 같던 이네스가 죽은 날, 다니엘 아저씨는 예약해 두었던 어린 강아지를 데려왔습니다. 나와 사장님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죠. 15년을 함께 보낸 개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커녕 당일 강아지를 또 데려오다니요. 괜히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는 아저씨에게 말했어요. 이네스가 죽어 슬프다. 나는 당신이 새 강아지를 위해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하고요. 생후 두 달 된 강아지가 15년 가까이 산다고 가정했을 때, 아저씨가 건강해야 그 개를 끝까지 돌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저씨는 개가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개가 없으면 바깥에 나갈 일도, 사람과 대화할 일도 없을 거라고요. 아저씨의 얼굴에서 절대적인 고독이 보였습니다.


그 후로 아저씨는 더 이상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마주쳐도 예전처럼 *비주와 시시콜콜한 말들을 나누지 않게 되었죠. 이네스가 생각날까 봐 강아지 종까지 바꾸어 데려왔다는 아저씨는 그 어린 개를 데리고 온 동네를 다녔습니다. 이네스가 그랬듯이요.


나는 사랑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것을 느리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고 고독을 즐기는 내가, 반대로 그것들이 몹시 견디기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도 깊이 들여다보려고 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개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다니엘 아저씨의 말도, 그게 얼마나 절박한 마음인지 알게 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냄새가 나고 털이 엉망이어도 이네스는 아저씨와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멋대로 선택한 개에게, 가장 잘해줄 수 있는 일은 함께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게 비록 아저씨 자신을 위해서든 아니든 간에 이네스는 행복한 개였을 것입니다. 퐁토슈 가의 터줏대감 이네스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지루하고 축축한 날들이 지속되었어요.

겨울이었습니다.





*비주: 볼에 하는 키스, 인사





이전 10화 도둑들을 위한 호구 안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