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인 Sep 16. 2023

쇼윈도 닦으세요

무슈 호베르

프랑스는 겨울에 우기가 시작됩니다. 여름에 비가 콸콸 쏟아지는 한국과는 반대이지요. 하지만 한국과는 그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늘 구름이 끼어 흐리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다 말다 반복하는 형태로 겨울의 끝까지 지루하게 이어지지요. 이러니 우산을 쓰는 것보다 대충 모자를 뒤집어쓰고 다니거나 아예 비를 맞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이고요.

세차게 비가 쏟아지면 아후 시원하다는 감탄사라도 내뱉겠지만, 파리의 비는 앞서 말했듯 부슬부슬, 샤워기에서 물을 흩뿌리듯이 내리다가 간혹 세찬 비와 함께 우박이 후두두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프랑스인들의 히스테릭하고 변덕 심한 면모가 약간은 이해되기도 합니다.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니까요. 길고 지루한 겨울을 살다 보면 온몸에 곰팡이가 자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곳 사람들이 해만 났다 하면 옷을 벗고 햇볕 샤워를 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아요.


북향인 가게에 앉아 겨울을 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굴처럼 안으로 길게 뻗은 가게에는 해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백 년도 넘은 이 석조건물에서는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습니다. 대체 나는 지금 몇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가위 갈아요’, ‘쇼윈도 닦아요’ 아저씨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저렇게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요. 어느 날 사장님이 말했어요. 가게 쇼윈도가 지저분할 때는 이분에게 연락을 하면 되고, 일이 끝나면 5유로를 드리면 된다고요. 바로 쇼윈도를 청소하시는 호베르 아저씨 말입니다.


파리의 주구장창 비 내리는 겨울 가운데에도 해가 반짝 뜨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가게 쇼윈도의 얼룩이 아주 가관입니다. 수많은 빗방울 자국을 비롯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만진 손자국까지 이런 꼴로 옷을 팔 수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럴 때 호베르 아저씨에게 전화를 겁니다.


“안녕하세요, 무슈 호베르! 오늘 가능하세요?”


“물론이죠. 지금 다른 가게 닦고 있는데, 오후에 들를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호베르 아저씨가 옵니다. 사장님과 아주 반갑게 *비주를 합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아프리칸의 얼굴. 프랑스에 와서 살다 보니 아시아 사람들만 동안인 게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호베르 아저씨 손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과 기다란 자루걸레가 들려 있습니다. 등에 맨 가방에는 세제가 들어 있고요.

아저씨는 가게의 커다란 유리창을 꼼꼼히 시간을 들여 닦기 시작합니다. 쇼윈도의 바깥면과 안쪽, 그리고 거울까지 닦으면 끝입니다. 나는 꼬깃한 5유로를 반듯하게 펼쳐 아저씨께 드립니다. 돈을 드리는 내 손이 왜 그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신 일에 대한 대가로 드리는 건데, 어쭙잖은 내 동정심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일부러 더 크게 감사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역시나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나도 사장님처럼 아저씨와 비주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보통 다른 프랑스 사람들은 양 볼을 살짝 닿는 정도로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맞대는데, 호베르 아저씨는 찐하게 볼에다 뽀뽀를 합니다. 나는 뒤돌아서서 옷깃으로 슬쩍 볼을 닦습니다. 이렇게 뜨겁고 정 많은 비주는 우리 시할아버지 외에 처음입니다.

아저씨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 과들루프(Guadeloupe) 출신입니다. 긴 드레드 머리에 노랑과 초록, 검정이 섞인 머리끈을 하고 있어서 혹시 자메이카 출신이냐고 물어봤던 탓에 알게 되었습니다. 5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저씨는 60살이 넘었고, 그래서 고된 이 일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한다고 합니다. 속으로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든 자식 공부시켜 좋은 대학 보내고 안정된 직장 찾아 남들처럼 사는 걸 보는 것이 부모들의 공통된 바람인데, 가게 쇼윈도 닦는 일을 물려주겠다니요.


가게에 앉아 있으면 어떤 날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손에 물통과 자루걸레를 든 아프리칸 남자들이 유리창을 똑똑 두드립니다. 대체로 프랑스어가 부족한 그들은 거절의 메시지에도 자꾸만 닦으라는 시늉을 하지요.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10유로, 아니 7유로, 5유로… 이렇게 혼자서 흥정을 시작하거나, 가게에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유리창을 탁탁 치고선 “어이! 어이!” 하고 부르는 아저씨도 있어요. “어이!” 하고 사람을 부르는 건 만국 공통인가 봅니다.

호베르 아저씨도 손에 물통과 자루걸레를 들고 거리를 다니긴 하나, 다른 사람들처럼 유리창을 치거나 닦으라고 조르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아저씨는 품위가 있는 편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퐁토슈 가의 많은 상점들이 아저씨에게 쇼윈도 닦는 일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물통과 자루걸레를 손에 들고 거리를 다니는 이 일을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말은 내게 놀라움과 문화충격으로 와닿았습니다.


한편 다민족 국가인 프랑스의, 특히 다양하고도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 있는 파리에서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건 극히 일부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히 유럽은 백인들이 산다는 착각,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선진화되어 있다는 오해, 그럼에도 이들이 이민자와, 어려운 사정으로 몰려온 난민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서 인간애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호베르 아저씨를 동정하고, 그의 결심에 내 기준의 잣대를 들이댄 자신이 무척 오만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이곳에서 모조리 새로 배워야만 하는 걸 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혐오의 씨앗이 자라지 않도록, 동시에 나 또한 이민자임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무수한 작은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하자고요.




*비주: 볼에 하는 키스, 인사


무슈 호베르
























이전 11화 이네스의 죽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