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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Oct 09. 2023

말이 많은 사람을 견디는 법

C'est la vie

낯선 이들이 말을 잘 걸어오는 편입니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지요. 그러나 가끔은 "그 관심 제발 좀 넣어둬."하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내게 말을 하기 시작할 때요. 관심이란 게 내게 보이는 인간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본인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발현될 때 그렇습니다. 문제는 관심의 대부분이 그 목적이란 점이고요. 


손님들이 말을 합니다. 말은 이야기가 되고, 소리가 되었다가, 이내 알파벳 a에서 d로, t와 모음 i로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내 정신도 함께 해체되어 눈앞에 있는 사람과 알파벳들의 뭉텅이가 공기 속을 부유합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일까요?


가게에는 옷을 사러 오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단지 말을 하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이 목적인 사람들은 옷을 보지 않고 나를 먼저 봅니다. 저 인간이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인가 아닌가, 마치 사자가 톰슨가젤을 사냥하기 전에 풀숲에 숨어서 동태를 살피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죠. 흔들리는 내 눈빛을 들켰다면 이미 늦었습니다. 사자들이 달려옵니다. 기표가 난무하고, 톰슨가젤은 허무하게 바닥에 미끄러지고 맙니다. 항복입니다.


다짜고짜 정치 이야기를 하는 마담, 내 영어의 문법과 발음을 꼬투리 잡아 가르치려 드는 이스라엘에서 온 남자 손님, "내 남편이 나를 떠났어."로 시작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단골 마담의 사생활, 가게에 들어와 옷은 보지도 않고 바로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뚱뚱한가 아닌가를 묻더니, 전혀 뚱뚱하지 않다는 내 대답에 그렇다면 불어의 'mince(날씬한)'과 'maigre(마른)' 사이에서 어느 정도인가를 강박적으로 물어오는 돌은 자, 내게 머리카락을 파란색으로 염색해라, 짧게 잘라봐라 등의 오지랖을 부리며 집요하게 사진 모델을 해 달라는 포토그래퍼 아저씨.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우리의 외로운 인간 군상들. 손님을 가장한 사람들의 푸념과 불평불만을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저들의 감정쓰레기통이 된 것만 같았어요. 스펀지처럼 부정적인 기운을 잔뜩 흡수한 나는 집에 돌아와 애꿎은 남편에게 퍼붓고는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잘 모르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 걸까요.


살면서 나는 늘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점이나 바에서 모르는 사람의 사정을 들었고요(도 닦으세요 말고요), 프랑스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시간이 남아도는 할머니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들은 길거리에서, 마트와 내가 일하는 가게에서, 심지어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했어요. 유통기한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민트 시럽과 금방 따라온 수돗물에, 역시나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비스킷을 앞에 두고 할머니와 나는 마주 앉았죠. 할머니는 이웃들의 비밀과 그들의 험담을 하며 내 동의를 구했습니다. 나는 연신 "Ah bon? C'est vrai?(아 그러세요? 사실이에요?)"라고 맞장구쳤죠. 물론 할머니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중요한 건 본인이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헛소리를 한다고 해도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데이지와 산책을 하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자신이 많이 아프고, 심장 수술을 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며 30분 넘게 하소연하는 걸 듣다가 "C'est la vie.(인생이 그런 거지요.)"라는 망언을 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던 적도 있었어요.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아줌마는 런던 헤롯백화점 30년 경력의 베테랑입니다. 그분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시지요. 물건을 팔려면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잘 듣고, 손님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처음에 나는 무척 동의했습니다.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게 없는 말이니까요. 그러나 가게에서 지내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의문이 들었어요. 손님들이 하는 길고 지루한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 게 판매원의 직업적 의무인가. 그렇다면 판매원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누가 보장해 주는가. 아줌마의 논리가 구닥다리처럼 느껴졌습니다. 가게는 더 이상 프랑스 마담들의 사랑방이 아니었어요. 아무도 모를 것 같던 퐁토슈 가에도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새로운 가게가 생기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퐁토슈 가에서 짬밥의 세월이 길어지자 나는 말이 많은 손님들을 빠르게 단념시킬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을 알아냈습니다.


C'est la vie.(이게 인생이지. 사는 게 그렇지.)


영화에서나 들었음직한 이 말을, 손님들뿐만 아니라 하소연 많은 내 시어머니에게도 내뱉기 시작했을 때, 떠들어제끼던 사람들이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 "음, 그렇지."하고 아련한 미소를 짓는 걸 목격했어요.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는 할 말이 없게 만들어버리는 이 문장이 내 언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의 경중이 피부에 온전히 닿지 않으니 마구 남발할 수 있었던 거지요. 때론 이방인으로 살면서 언어가 서툰 부분이 장점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느리고 다소 서툴게 프랑스에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C'est la vie(쎄라비)'의 마법은 나 자신에게도 유효합니다. 물론 약간은 다른 의미에서요. 지쳐서 이곳을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이 올 때, "쎄라비"하고 읊조려봅니다. 한국어의 "그게 인생이지."와는 다른 어감의, 낭만과 프랑스에 대한 모든 클리셰를 포함하고 있는 이 문장이 내게 힘이 되어주는 날이 지속될 때까지 나는 프랑스에서, 퐁토슈 가의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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