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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Sep 30. 2023

다른 세계의 삶

이름 앞의 ‘프린세스’

옷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아주 즐기는 외향적인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집에서 조용히 소설책을 읽거나 혹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타입이죠.


소설을 좋아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엔 이렇게도 다양하고 희한한 인간 군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작중의 인물이 겪는 어마무시한 고난에도 내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그게 바로 소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내 그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옷가게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소설 속의 인물들이 현실로 걸어 나온 것만 같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손님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어요. 처음에는 남미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스키니진에 티셔츠, 화려한 화장과 약간 어두운 피부톤 탓에 그녀가 함께 온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듣기 전까지는 아랍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했죠. 그녀는 옷을 입어보지 않고 여러 벌을 대충 고른 뒤 계산을 부탁했습니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그녀는 동시에 일행에게 레스토랑에 가서 어떤 음식들을 주문해 두라고 지시했어요. 택시를 부르고, 쇼핑백을 대신 들고나가기도 하는 동행자는 바로 그녀의 비서였습니다. 그리고 남미에서 온 줄 알았던 손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주였어요. 텍스프리를 하면서 여권을 보니 이름 앞에 ‘프린세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여러 왕족이 있는데, 그 왕족 중에도 조금 더 높고 낮은 등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가게에 온 손님은 지위가 높은 왕족의 공주라고 해요.

디즈니 세상 밖에도 공주와 왕자가 존재하는 세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공주는 히잡을 벗고, 스키니진을 입고선 파리에 와서 비서를 대동하고 쇼핑을 하는 건가 봅니다. 때론 우리의 삶이 더 허구 같고, 소설이 진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간혹 다른 아랍국가나 인도에서 온 부유한 손님들은 착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옷을 파는 판매원을 자신들의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죠.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키며 피팅룸에 갖다 두라고 지시하거나, 아주 거만해서 당장 내쫓아버리고 싶은 손님들도 있었어요. 프랑스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이 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죠.

그러나 나는 이내 깨달았습니다. 무례하게 굴어도 많이 사는 손님이 최고라는 것을요. 잠깐 보고 말 손님의 무례한 행동 따위는 어떤 단위를 넘어가는 액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리고 한술 더 떠 입에 발린 소리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존감은 손님들의 에티켓보다 그날의 매출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매출이 높은 날에는 못돼 처먹었던 손님들의 험담을 마치 영웅담처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단지 자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한편 내 귀에 익숙하지 않은 나라의 언어들을 듣는 것도 소설적 상상에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람들의 언어는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휘 휘 하는 특이한 발성이 있었고,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온 바이어가 구사하는 영어는 스코틀랜드 영어만큼이나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손님들의 히브리어는 그 유명한 유발 하라리를 떠오르게 했고, 캐나다 퀘벡과 코르시카 손님들의 불어가 내가 듣는 불어와 얼마나 다른 지도 체감할 수 있었어요.

손님들이 나가고 나면 나는 구글 지도를 열어서 내가 있는 지점과 그들 나라와의 거리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두 좌표 사이의 거리는 때론 어마어마하게 멀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친근한 느낌이 들었죠.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의 삶을 손님을 통해 아주 잠깐 들여다보는 경험들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게 가게는 마침표가 없는 소설책 같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주와 한국의 유명 연예인이 들렀다가고, 험상궂은 아저씨가 다짜고짜 일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는 곳, 가게 밖 퐁토슈 가에서는 불법 정차로 인한 사소한 싸움이 벌어지고, 색소폰을 연주하는 아저씨가 가게 앞을 스쳐갈 때 이 모든 혼란과 낭만이 뒤죽박죽 된 이것이야말로 진짜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안에 나를 살포시 놓아두고, 나는 닫히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씁니다. 어쩐지 짠한 구석들이 느껴지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하지만 용감하게 인생을 헤쳐가는 퐁토슈 가의 사람들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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