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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Oct 18. 2017

죽음을 찬미하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2017년 9월의 첫 날, 94년을 잘 살아내시고 저 생으로 평안히 떠나셨다. 그 분의 둘째 딸인 우리 어머니 딸로 태어난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컸고, 서울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경북 작은 시골에 있었던 외갓집 덕분에 사시사철 자연이 주는 푸근함과 다채로움을 눈과 가슴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에 앞선 며칠 전, 가수 조동진 씨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를 전했다. 콘서트를 몇 주 앞둔 시점이었다. 암 투병 중인 그가 후배들과 콘서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마조마한 마음 다독이고 응원을 보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뉴스를 읽어내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70년 인생을 대한민국 포크계의 큰 별로 살아온 그가 남긴 음악을 들으며, 나는 기타 소리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담백한 노랫말이 얼마나 유려한 그림을 그려내는지 느꼈다.

외할아버지와 큰 이별을 나누고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또 하나의 부음을 접했다. 마광수 교수의 자살을 알리는 속보였다. 한창 여고 교실에서 돌던 ‘HR’의 수위를 웃도는 작품이라며,  당시 공부 좀 하고, 놀기도 좀 놀고, 수능이라는 새로운 시험제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논술준비로 각 신문의 사설도 열심히 읽어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친구들과  ‘즐거운 사라’를 구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읽지 못했으니 그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하고 각종 시험에 가려 흐지부지되었으리라. 이후 그의 이름은 표현의 자유나 사회적 윤리적 잣대라는 단어와 버무려져 있다가 2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잊혀져갔다. 그러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길을 떠난 그의 뒤를 밟는 심정으로 뒤늦게나마 그에 관한 글 속을 며칠 헤맸다.


불과 열흘 안팎으로 접한 다양한 형태의 죽음 탓일지, 언젠가부터 계절이 변하는 시기에 겪고 있는 감정과잉의 상태 때문일지, 다시금 죽음에 집중하게 되었다. 몇 해 전, 젊음에 대한 헛된 집착과 고민을 하며 뜬금없이 '생의 끝’에 대한 생각을 강하게 피력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전력이 있는 나였다. 그래도 그런 경험 덕분에, 이젠, 상대적으로 큰 진폭의 내 감정 상태를 용인하며 마음껏 생각과 고민과 잡념 사이를 오가고 있다. 보고 싶었으나 볼 수 없는 무대가 되어버린,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라는 제목을 단, 그리고 <지금 아니면 또 언제올지 모를 하나의 공연>이라는 부제를 단,  조동진 씨의 콘서트 포스터를 꽤 긴 시간 들여다보았다. 아니, 마음과 눈을 쉽게 거두기가 어려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볼 수 없게 된, 다시 오지 못하게 된 누군가의 무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조동진과 후배 가수들이 함께 할 예정이었던 콘서트 포스터이다. 이 콘서트의 부제는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올지 모를 ‘하나’의 공연’ 이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로 1920년대 ‘신여성’의 대표인물로 꼽히는 윤심덕이 헝가리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Donauwellen Walzer)’에, 자작시로 알려진 이 가사를 붙여 일본에서 녹음한 노래가 있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녹음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1926년 8월 4일 새벽, 연인으로 알려진 김우진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사건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고, 그 여파로 이전까지는 부유층의 전유물이며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레코드가 단숨에 일반에 보급되기도 했다. (당시 두 사람의 정사(情死)사건은 크게 알려졌으나, 정작 음악은 들을 수 없었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너도나도 축음기를 들여 음반을 사서 화제의 곡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기인해 최근 유시민 작가는 한 프로그램에서 윤심덕의 최후에 축음기 회사의 '음모론' 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당시, 부산에서 전보로 급히 타전된 동아일보 기사를 옮겨본다.      


懸解灘激浪中에 靑年男女의 情死

극작가와음악가가한떨기꼿이되야 세상시비더저두고끗업는물나라로

男子는金祐鎭 女子는尹心悳

지난삼일오후열한시에 하관(下關)을떠나 부산(釜山)으로향한관부련락선 덕수환(德壽丸)이 사일오전네시경에대마도(對馬島)엽흘 지날지음에 양장을한녀자한명과중년신사한명이 서로껴안코갑판으로돌연히바다에 몸을던저자살을하엿는데즉시배를멈추고부근을수색하엿스나그종적을찾지못하엿스며그선객명부에는남자는전남목포부북교동 김수산(金水山)녀자는경성부서대문뎡이뎡목일백칠십삼번디윤수선(尹水仙)이라하엿스나 그것은본명이아니요남자는김우진(金祐鎭)이요녀자는윤심덕(尹心悳)이엿스며유류품으로는윤심덕의돈지갑에현금일백사십원과장식품이잇섯고 김우진의것으로는 현금이십원과금시게가드러잇선는데련락선에서조선사람이 정사를한것은이번이처음이라더라(부산뎐보)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 3면>    

 
같은 지면에는 이어 ‘음악가인 윤양’과 ‘극작가인 김씨’의 각각의 ‘내력’과 “예술(藝術)에 공명(共鳴)되야” 8년 간 사랑하는 사이였던 “량인이 모다 속으로는 극도 번민” 하던 중 “情死에 이른 兩人의 關係”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각기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싣는가 하면, '형'이라 일컬은 윤심성 여사와 어머니 김씨 등 가족과 나눈 인터뷰도 있다.

생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던 그 노래를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부를 당시도 상세히 전하며, "그 옆에 있던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였으며, 반주를 하던 동생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이에 "음반회사의 일본인 관계자도 윤심덕의 태도가 너무 감상적이라 주의를 시키기까지" 했단다.  이에 "윤심덕은 웃음을 지는데  그 웃음도 쓸쓸한 웃음이었다" 고 그 관계자가 덧붙였고도 전한다.

                                                                        

며칠에 걸친 기획기사로 윤심덕 김우진의 개인사와 연애사,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조명하는가 하면, 이후에는 “윤심덕김우진량인의정사문뎨는조선청년남녀가한번톡톡히토론하고판단을나릴필요가잇는줄암니다여러분의긔탄엄는투서를구함니다” 라는 제목을 달고 독자들의 의견도 활발히 싣는다. 독자들은 윤심덕의 여자로서의 행실문제를 조목조목 탓하기도 했고, 윤심덕에 비해 당시 비교적 덜 유명했던 김우진과의 동반 자살에 대해 그 사실관계 자체에 의문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조선 청년으로서의 책임감을 망각하고 연애로 인해 생의 ‘의의’와 ‘가치’를 져버린 두 사람을 꾸짖는 글도 보인다.


그렇게 윤심덕의 마지막 취입곡이 되어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30년 남짓한 그 짧은 삶을 영화로, 뮤지컬로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 노래의 제목은, 당시 “죽엄의찬미”로도 불리었던 ‘사의 찬미(死’의 讚美)다.    

  

윤심덕 <동아일보> 1926년 8월5일자에 실린 사진.
장미희가 윤심덕으로 분한 영화 <사의 찬미>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2017년의 뮤지컬 <사의 찬미>포스터-출처:인터파크 티켓


이 ‘사의 찬미’가 내게 극적으로 다가온 때와 이유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때는 고1 때, 장미희 주연의 영화 '사의 찬미'를 통해서였으며,  윤심덕의 드라마틱한 최후보다, 사실은 ‘찬미’라는 단어 때문에 너무 '극적'이었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을 뜻하는 찬미(讚美)란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이 제목 덕분이었으며, 당시 또래 친구들보다 한참 철이 없었던 나로서는 죽음을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 칭송한 것에 너무도 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절대로’ 죽음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 칭송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소녀는 어느새 어른의 삶을 기웃거리게 되었고, 사고나 타인에 의한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 아닌 한, 다양한 죽음에 대해 곱씹어보고 돌아보고 열린 생각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생의 완성으로서 사를 들여다보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더없는 죽음의 복을 가지셨다며 어르신들의 부러움이 가득했던, 그 생의 마무리를 곱게 보여주신 외할아버지와 이별하며,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떠나간, 병마만 아니었다면 어찌 보면 예술가들이 원하는 삶을 끝까지 살다간 한 가수의 죽음을 전하며, ‘다름’을 곧 ‘불편함’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겨웠을, 솔직함에 대담했던 한 사람의 선택을 접하며, 나는 죽음을 향해 또 한걸음 자연스럽게 다가앉아본다.

이 가을,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한 사람으로서, 먼저 그 인생의 달리기를 멈춘 모든 이들에게 그동안 정말 애쓰셨다고 조용히 전한다. 더불어, ‘가는 곳 어데인지’,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쓸쓸한 세상 고해(苦海)’속에서, 살아있는 한 계속 헤맬 수밖에 없는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가수 조동진 씨가 남기고 간 위안을 전한다.         


                    행복한 사람     

   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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