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정연주 Dec 28. 2018

어느 방탄 팬의 조금은 긴 고백

'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한국어문기자협회 발행 <말과 글> 中

     뒤늦은 감이 있으나, 이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나에 대해 소상히 아뢴다. 귀한 기회를 얻어 대중가요와 관련된 관심사를 풀어낸 지 2년 여 만이다.   

     내 인생 최초의 대중가요는 <진정 난 몰랐었네> 이다. ‘인생 최초’라 정확히 할 수 있는 근거는 1976년에 세상에 나온 내가 야무지게 “발끼이이를 돌리려고 바담 부는 대로 걸어도~”로 시작해 웅얼웅얼 옹알옹알 따라 부르다 “아아아아아~~찐정 난 모올라아어었네~” 부분은 씩씩하게 불러 젖힌 녹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수 최병걸 씨가 1978년에 발표해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곡이었음을 알게 된 때는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서른 해가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라디오 생방송을 앞두고 그 날 선곡된 곡을 미리 들어보던 중이었다. 옛 가요를 들어보는 코너에서 소개될 곡이었는데, 듣는 순간 그야말로 심장이 쿵 소리를 내는 듯 했다. 아빠 서재 한 쪽 상자 안에 잘 보관돼 있는 <정 연주 노래 재롱>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카세트테이프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아가 목소리의 내가 부른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 제대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노래를 녹음할 때 내가 내복 차림이었다느니, 레고블록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했다느니, 고모들이 박수 치고 웃다 뒤로 넘어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아빠는 정작 그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는 알려주지 않으셨고 나도 궁금해 하지 않았으며, 그 노래의 원곡을 제대로 들어 본 기억이 없었기에,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낯설지만 익숙한 노래가 신기했고, 왠지 코끝은 찡 가슴은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1978년 최병걸은  유승엽, 이숙 등과 함께 총 10곡을 모아 컴필레이션 음반을 냈다. 그의 대표곡인 <진정 난 몰랐었네> 와 정소녀와의 듀엣곡 <그 사람>이 크게 히트했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공부하듯’ 노래를 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시대 순으로 훑기도 했고 장르별로 살피기도 했다. 음악 방송을 하며 ‘전문성’을 갖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듣는 것이 마치 숙제 같았던 때였다. 하지만 ‘나의’ <진정 난 몰랐었네>를 제대로 들으며 ‘심쿵’한 순간을 겪고 난 이후부터는 강박을 조금 버리고 들리는 대로 들어보고자 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청취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무수한 곡들을 편견 없이 들었다. 방송 중 내보내는 음악에는 최대한 몰입하며 소리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렇게 만난 대중가요들은 내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에 함께 했던 익숙한 대중음악들 못지않게 어느 시기의 곡이든 어떤 사람의 곡이든 어떤 언어의 곡이든 마음 열고 알아가는 만큼 풍성하게 들리고 읽혔다.

     그런 내게, 운이 좋게도, 우리 대중가요사와 방송사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만들어낸 이종환 선생님과 스튜디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시기가 더해졌다. 한 조각씩 얻어듣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대한민국 DJ사’를 정리해보겠다는 거창한 포부가 생겼다. 구술사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당시 지도 교수님의 지지를 얻어 용기백배하여 이종환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반기셨고 진심으로 당신께서도 도와주고 싶어 하셨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힘들어 하시던 시기였기에 당신의 후배인 지명길 선생님을 소개해주셨다. 지명길 선생님은 '사랑의 미로','파란 나라' 등의 작사가로, 1962~73년까지 음악감상실의 전문 DJ로 활동하기도 했다. 덕분에 한 학기 동안 소통하며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DJ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호기심이 생겼고 이후에는 우리 대중가요사 전반으로 그 호기심이 번졌으며, 결국엔 1950년대를 중심으로 관심이 깊어졌다.


 
      195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는 전후 미군 주둔지 클럽에서 이뤄졌던 공연을 중심으로 발달하며 급격히 서구화되었다. 정확히는 그 때부터 미국 대중음악과 깊숙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실력이 출중했던 우리 음악인들은, 치열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익혔던 미국의 대중음악을 그들의 내재된 재능과 잘 버무려내며 우리 대중가요사를 새로 만들어나갔다. 지명길 선생이 설명한 당시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본다.


      “미8군이 들어오면서 공연단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서 클럽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데 50년대 중반부터 그게 직업화돼요. 지금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실제로 ‘음악인들 전체’가 그 무대에 서요. (피난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하던 사람들도 먹고 살게 없는 상황에서, 거기서 무슨 피아노 독주회를 할 것도 아니고, 바이올린 연주회를 할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이 이 분들도 그 교수님들도 쇼단에서 연주를 하는 거예요. 바이올린도 하고 첼로도 하고 피아노도 하고. 그러니까 6.25 이후에 공연문화가 갑자기 수준이 높아져요. 엄청 높아져요. 높아지면서 미8군쇼라는 것이 미군들이 보기에도 엄청나게 수준이 높은 쇼가 돼요. 빅쇼에서부터 조그만 클럽 쇼까지. 클래식을 하는 순수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같이 어울려서 연주를 하고 쇼 만들고...”


      이런 1950년대 이야기와 당시 대중음악을 다룬 기사와 문헌들을 뒤져, 우리 대중음악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며 문화적 혼종성 개념을 바탕으로 논문을 썼다. 문화적 혼종성(Cultural hybridity)에 대한 설명 가운데에서도 '서구적 근대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서구를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유입된 외래문화를 독자적인 관점에서 변형시키려는 저항이 나타난다는 기존 연구결과에 동의하며 우리의 주체적인 문화적 실천에 주목해보았다. 결론 부분에는 당시 세계를 휩쓸고 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인기 비결을 살짝 분석하며 “세계적 음악 트렌드를 잘 반영하여 한국인의 색다른 창의성이 더해져 탄생한 곡”이고, 그와 동시에 “세계 어디서든 각자의 스타일로 해석과 변용이 가능한, 매우 유연한 대중음악적 혼종물”이기에 가능한 인기 현상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K-POP이 세계화와 초국가적인 문화흐름에 의해 생겨난 다양한 혼합과정을 거쳐 탄생”했고, “새로운 미디어와 결합하고 다양한 대중음악인들이 국적을 넘나들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중”임을 밝히며 이렇게 덧붙였다. “K-POP이 세계적 대중음악 장르로서 위상이 확고해지려면 세계의 대중을 상대로 직접적인 공연무대가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하고, “<강남스타일>의 확산에 주목해 SNS 등의 새로운 매체를 다양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당연한 얘기를 어깨에 힘주고 한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실제 미국에서 매해 펼쳐지고 있는 K-CON이나 현지 투어공연 등의 역할과 SNS가 우리 음악인들의 활발한 장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흐믓하다.  




      이런 쑥스러운 글을 세상에 드러낸 게 2012년 12월이었다. 내가 나름의 공부를 하며 혼종적 성격이 강한 우리 대중음악을 들여다보고 K-POP의 미래에 수줍은 조언을 하고 있던 바로 그 때! ‘방시혁’이라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한 ‘엘리트’는 ‘힙합돌’을 표방하며 7명의 소년들을 모았다. 2012년 12월 17일 트위터에 공식계정을 열었고 12월 22일에는 ‘방탄룸’ 이라 불리는 블로그를 만들어 연습과정과 소소한 일상, 다양한 활동들을 꾸준히 올리며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그들은 드디어 첫 번째 싱글앨범을 내고 소년들은 데뷔무대에 오른다. 이후 꾸준히 그들의 음악과 춤으로 전 세계 팬들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 방탄소년단, BTS 얘기다.

2011년 방시혁의 빅히트엔터테인먼트사는 공개오디션을 시작해 방탄소년단을 결성한다. 당시 오디션을 알리는 포스터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2018년,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큰 경사 중 하나는 6년 전 탄생한 BTS의 뜨거운 활약이다. 그래봐야 ‘아이돌’ 아니냐며 비웃는 자 있다면, 마음 열고 귀와 눈을 크게 열고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한번 쯤 보고 이야기해보길 바란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으나, 그들의 음악과 춤에 마음을 얼마나 빼앗길 수 있는지, 다양하고 깊은 서사가 숨어있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왜 그들이 ‘팬들을 공부시키는 아이돌’ 또는 ‘문학돌’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보일 것이다. 도대체 ‘방탄’이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궁금한 자 있다면 유튜브에서 관련 검색어를 넣고 잠시 살펴보길 바란다. 그들의 음악과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재생산해내고 있는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다양하고 방대한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힙합 정신’ 운운하며 음악적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따지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졸저이지만, 문화적 혼종성을 설명한 2013년 2월에 제본되어 나온 정연주라는 사람의 논문을 정독해보길 권한다. 커다란 맥락 속에서, 그들이 맺은 열매가 어떤 토양 위에서 어떤 자양분을 먹으며 자라난 것인지 조금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DNA'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아, 뒤늦게나마 내 대중가요사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커 오게 된 것인지를 아뢰고자 했으나, 결국은 방탄 팬임을 드러내는 글이 되어버렸다. 요즘 나의 대중음악사에 대한 관심은 ‘방탄소년단’과 K-pop에 조금 깊이 머물러 있음을 인정한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감격하며 한국말로 된 가사를 ‘명확한’ 발음으로 함께 부르는 광경을 보면, 그동안 문화적 변방에 살고 있다고 느끼며 지낸 시간이 길어서인지, 나는 괜히 눈물도 나고 가슴이 심히 뛴다. 그들이 천만 명이 넘는 팬들과 함께 어떻게 성장하고 진화해갈지, 음악적으로도 세계적 대중음악사에 어떤 획을 그어 나갈지, 나아가, 우리 대중음악과 예술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신명나게 한 판 크게 놀아줄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이전 08화 죽음을 찬미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