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를린 먼로와 양귀비의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은 태어난 지 서른 여섯 해가 되던 때에 자의든 타의든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갔다. 내가 태어난 지 서른 여섯 해 쯤 되었을 때, 나는 이따금 내일 아침에 새로운 날을 맞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내 필력도, 내 내공도 부족하니 그냥 접기로 한다. 그렇게 나는 마를린 먼로와 양귀비와 나를 괴상한 동일선에 엉뚱하게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는 것만 그냥 밝힌다. 그렇고 그런 날을 그럭저럭 매순간 무엇인가에 취한 채 잘 지내오던 어느 해 여름, 어디에선가 무대 위 마를린 먼로의 사진을 봤다. 어깨를 드러낸 그녀의 무대 의상과 샌들 차림으로 여름을 짐작했으나, 때는 한겨울이었고, 그녀가 서있던 곳은 대한민국의 어느 군부대에 마련된 무대였다. 사진에 이끌려 그녀 얘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다름아닌 그 무대에서 자신이 항상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고백했단다. 그 고백의 출처인 <마를린 먼로, The Secret Life>란 얇지 않은 책을 들고서 누군가와 했던 약속 장소인 여의도에 들렀던 어느 날이었다. 시간이 남아 배회하던 여의도 공원 안, 왠 구식 비행기가 눈에 들어오는 벤치에 앉아있자니 무언가 말을 걸어왔다. 그것과 짧지 않은 대화를 마친 나는 그녀, 마를린 먼로보다는 조금 더 살아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다. 서른 여섯 해를 훌쩍 넘겨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내가 서있는 무대는 어떻게 달라질 지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내 이름은 ‘여의도’라오.
공원 이름 치고는 참 무미건조하지만, 삭막한 빌딩 숲속에서 이런저런 수목들을 품어 푸른빛 가득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이름이야 어떤들 난 만족하오. 내가 공원으로 거듭난 지 올해로 벌써 18년을 넘기고 있소만, 사실 난 광장이었다오. 아스팔트 위에서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내 품을 즐기던 어린아이들이 이제는 중년의 나이로 한껏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짊어진 채 다사다난한 대한민국을 살아내고 있을 것 같구려.
여의도 광장이란 이름을 얻기 전, 나의 이름은 5.16 광장이었소. 지금 국회의사당이 있는 '양말산'을 중심으로 한강변 조그만 섬이 엄청난 속도로 개발되던 1960년대 말과 70년대 당시 5.16이란 숫자는 혁명적으로 기념이 될 날짜이며 숫자였기에 광장 이름으로 ‘손색’이 없었다오.(후에 나를 공원으로 만들며 이름을 ‘박정희 공원’ 으로 명명하자고 했던 서울시장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5.16 정도는 양호했다고도 느껴지오.)
조금 더 옛날 얘기를 해 보자면, 난 비행기가 뜨고 내리던 비행장이기도 했소. 당시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없었다오. 일본의 식민지로서 존재하는 땅덩어리 중 일부였던 내 안에, 일제는 비행장을 만들기 시작해 예닐곱 달에 걸쳐 격납고와 활주로를 만들더니 일본과 만주를 잇는 항공수송 요지로 쓰기 시작하더이다. 해방 이후에는 국제공항으로 승격됐다가, 이후 1958년 김포에 국제공항이 생기면서 나는 공군기지로만 이용되었소. 1971년부터는 아예 유사시에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을 ‘공간’으로만 남게 된다오. 이른바 광장으로 말이오.
이제 본격적으로, 내가 비행장이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좀 해 보려 하오. 일제 강점기에 시작됐던 비행장 역할로서의 내 생애 가운데 가장 감격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1945년 8월 18일을 꼽겠소. 일본의 항복 직후, 임시정부의 환국일보다 석 달 앞선 그 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가 한국 광복군 정진대로서 C-47 수송기를 타고 내 품에 내렸던 날이 바로 그 날이오. 요즘 그 수송기와 같은 기종이 현장에 전시돼, 잊힌 줄만 알았던 이런저런 옛이야기들을 해 주고 있는 것을 보니, 이 땅에 사는 한없이 어리석고 무책임한 후손들이 뒤늦게나마 내 마음 한 자락을 나눠 갖나 싶어 반가울 따름이오.
오늘 난 그 시기보다는 조금 이후에 있었던 수줍은 내 추억 하나를 꺼내볼까 하오. 해방 이후, 미군들이 활용하는 비행장이었던 나를 통해 입경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내게 좀 특별했던 그녀를 추억해 보리다. 때는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난 이듬해 겨울이었소.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일본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하오. 그러던 중, 당시 극동지역 지휘본부에 있던 존 E. 헐(John E. Hull) 장군에게서 한국에 있는 미국 군인들을 위해 공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오. 신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수락하고 결국 나를 통해 이 땅을 처음 밟게 되었소. 다음은 그녀가 도착한 1954년 2월 16일 당시를 상세히 적은 신문 기사요.
미국 은막의 여왕 「마리린·몬로」 여사는 十 六 일 정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면서 四 발대형기로부터 여의도에 내렸다. 지난 정월 「뉴욕」직업야구선수인 「죠·디마기오」씨와 결혼함으로써 자유세계에 화재의 주인공이 되었던 「몬로」여사는 비행장에 나온 수백여명에 달하는 미군사병들의 환호와 고함소리에 손을 흔들며 응수하였다. 시종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몸짓은 미국영화계에서 세련된 만큼 독특한 것이었다. 미모의 여왕을 직접 눈앞에 보고자 비행장에 모여든 약 六백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흥분된 모습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루었다. 군복을 입었으나 「와이샤쓰」단추를 절반이나 끼지 않고 젖가슴이 보일랑말랑 하는 것이 사병들의 흥분을 더욱 돋우는 것 같았다. 동여사가 전선으로 가기 위하여 미리 준비된 「헤리콥터」에 올라타자 기대에 이그러진 사병들은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느냐』고 묻자 『곧 돌아오겠다』고 마치 어머니가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이 애교를 부렸다.「몬로」여사는 앞으로 四 일간 한국에 체류할 것이다.
(<조선일보> 1954년 2월 18일 2면,“쾌활한 웃음과 함께 미녀배우 「몬로」양 입경”)
그날 어찌나 시끌벅적했던지 내 전체가 들썩들썩했던 것으로 기억하오. 알고 보니 그녀는, 대한민국이 한창 포화에 휩싸여 있을 당시,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외모와 독특한 매력으로 미국에서 섹스 심볼 자체로 군림하던 배우였소. 그녀가 1953년도에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그녀의 매력을 가리켜 “아이 같았고 순진했으며 유혹적이면서 빛이 났다”고, “활짝 피어났고, 크림을 얹은 신선한 딸기 한 접시처럼 유용한 것이었다”고 표현한 어느 작가의 말을 굳이 빌려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가진 묘한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핫’ 한 미국의 대중스타가 나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 이후 4일간 10여 차례에 걸쳐 총 10만 명 이상의 군인들을 앞에 두고 전선 곳곳에서 대단한 무대공연을 펼쳤다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노출을 마다않고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며 ‘다시 한 번 키스해 줘요(Kiss Me Again)’나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의 가장 좋은 친구(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같은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소.
대구 동춘 비행장에 나가 그녀의 환영행사에 함께했던 배우 김동원은, 그녀의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옷차림과 행동을 자세히 묘사하며, 처음으로 서양 배우를 만나 가슴 두근거렸던 추억을, 그녀와 악수를 교환할 때 “그녀가 난로 앞을 지나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와 같은 기가 막힌 비유로 전하기도 했다오. 스크린을 통해 소개된 그녀와 같은 미국 유명 배우의 입국과 그녀의 모든 행동은 여러모로 당시 우리 대중들에게, 정확히는 우리 대중문화 연행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갔으리라 짐작되오.
그녀의 방문과 같은 위문공연뿐 아니라, 미국은 미국위문협회(USO : United Service Organization)라는 단체를 통해 해외에 파병된 군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꾸준히 진행했소. 한국전 당시에도, 유엔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했던 1950년 7월 8일 직후부터 미국의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오기 시작했다오. 1960년대 초반까지 그런 위문공연은 활발하게 이어졌소. 하지만, 미국 연예인들이 자국을 떠나 머나먼 극동지역의 한국을 찾아 나를 밟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오. 또한 주둔 병사 규모가 워낙 컸기에 그들을 위한 공연을 펼치기에는 미국 연예인들의 내한이 아무리 잦았다 한들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오. 결국 1952년 즈음부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의 위문공연단을 대신해 미군을 위한 무대에 오르게 된다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미8군 쇼’ 무대의 시작이 바로 그것이었소.
요즘, 젊은 친구들 몇이서 내 품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오. ‘랩’이라고, 어떤 가수의 노랫말에 따르면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말하면 되는 노래’ 라고 하던데, 자주 듣다 보니 언젠가 들었던 옛날 시조 운율을 맞추며 노는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꾸 듣다 보니 ‘라임’인가 뭔가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고 그렇소. 허나, 제법 귀에 감겨드는 것을 보니 이제 나도 그것을 꽤나 좋아하게 된 것 같소. 불과 서른여섯 해를 살다 흙으로 돌아간 그녀는 살아생전 들을 수 없었을 노래를, 그녀의 나라에서 건너온 것임에도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 식으로 멋지게 소화해 내는 그런 노래를, 나는 이렇게 만나고 즐기게 되었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한국에서 경험한 무대의 추억을 그녀 인생에서 아주 중요했던 순간으로 기록하고 있더이다. 연예계 입문 후 처음으로 자기 스스로의 본능과 판단만으로 관중 앞에 나서 그들의 환호성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목도한 그녀는, 그때만큼 자신에 대해 기분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날 보고 있는 사람들이 날 받아들이고 있고 또 날 좋아하고 있다고 느꼈죠. 그게 내가 항상 원하던 거였어요”라는 고백을 했다 하오. 그 정도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것만큼, 그녀 또한 나를 통해 밟았을 이 땅에서의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했으리라 믿어도 될 듯하오만. 흐흠.
끝으로, 먼로 양, 아니, 몬로 여사에게 한마디 하고 싶소. 비록 내겐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잠시 내 품에 있었던 당신. 어느 누구보다 강렬했으나 아픈 인생을 살다간 당신을, 멀리에서, 나, 여의도가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