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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Jan 13. 2020

탑골공원의 음악적 가치에 대한
소고

'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한국어문기자협회

      지난  2019년에 나타난 새로운 말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말을 꼽으라면, 나는 ‘온라인 탑골공원’을 꼽겠다. SBS를 시작으로 각 방송사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과거 자료 가운데 매주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대중가요 순위프로그램을 24시간 연속으로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에 내보내기 시작한 것에, 대중들이 커다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온라인 탑골공원’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1999년에서 2000년까지의 방송분을 중심으로 스트리밍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에 중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제 많게는 40살을 넘긴 사람들부터 30대 전체에 이르기까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청소년 시기 추억을 고스란히 꺼내보며 옛날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이 채널을 인식하며, 노년층이 많이 모이는 공간인 ‘탑골공원’의 상징성을 빌려와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명명하며 자신들의 놀이터로 만들어버렸다. 

동시 접속자 수가, 한창 일상을 살아내야 할 시간대인 한 낮에도, 만 명을 넘기는 것은 흔한 일이요, 당시 무대를 보며 실시간 채팅으로 접속자들이 나누는 이야깃거리는 음악보다 더한 ‘감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에 자신들이 한창 하던 PC통신에서 이뤄지던 것과 같은 ‘채팅’을 하며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재미있는 ‘드립’들을 따로 모으는 공간까지 생겨났다. 가수들의 노래며, 의상, 안무, 당시 사회모습까지 실시간 채팅창에서 오고가는 글들을 보다보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훑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최근에는 3,40대보다 더 어린 세대들도, 현재 ‘예능인’으로만 알고 있던 연예인들이 과거 뽀송뽀송한 어린 얼굴로 화려한 무대 위를 누비며 가수로 활동하는 것에 신기해하며 ‘온라인 탑골공원’을 즐겨 찾고 있다. 11월 24일 현재, ‘온라인 탑골공원’의 원조 격인 SBS KPOP CLASSIC 채널은 1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독중이며, 스트리밍 시기의 폭을 넓혀 1995년 10월~2002년 9월까지의 방송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 

유튜브에서의 온라인 탑골공원에서는 과거 pc통신  채팅과 같은 경험을 다시금 하며 그 시절을 재연하는 즐거움도 존재한다.(사진출처:내이버 이미지)

     온라인에 세워진 탑골공원을 살펴보니, 여러모로 대중가요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세대론 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생각해보게 된다. 먼저 ‘온라인 탑골공원’이란 명칭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들의 심리를 헤아려본다. 어느덧, 사회 초년생 딱지를 뗀 지는 꽤 되었고, 늘 젊은 감각과 어린 느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신들과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어느새 더 ‘어른스러워’져야한다는 강박관념도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미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의 K-POP이라 불릴 수 있을 우리 대중가요에 충분히 노출되어 살아왔기에, 현재 활동 중인 인기 가수들에게도 ‘삼촌팬’, ‘이모팬’으로 자리매김하며 충분히 팬심을 드러낼 수 있기는 하나,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팬들과 같이 즐기기에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기도 하고 스스로를 ‘어르신’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즈음, 자신들이 ‘한창’ 일 때 보던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 그들의 스타들을 그 때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런 감격어린 마음에 더해, 같이 나이 들어가며 어린 시절의 경험을, 그것도 대중가요를 매개로 한 즐거운 경험을 공유할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게 되었으니, ‘어르신’, ‘노인’을 연상시키는 ‘탑골공원’의 이미지조차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감’을 보이며 ‘온라인 탑골공원’ 이란 이름 아래 뭉치기 시작한 것이리라. 


      이제, 그들이 세운 ‘온라인 탑골공원’ 이 아닌, 종로의 실제 ‘탑골공원’으로 마음을 옮겨 살펴본다. ‘탑골공원’이 제 이름으로 불리게 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추정만 하고 있는 이 공원의 실제 개원연도는 1895년 또는 1896년이며, 조선시대 원각사가 있던 터에 생긴 서울 최초의 근대식 도심공원이었다. 탑이 있는 동네에 만들어진 공원이라 하여 ‘탑동공원’, 또는 ‘탑골공원’으로 부르던 것을 당시 영국인이 설계를 했다는 ‘설’에 의해 언제부터인가 ‘파고다 공원’으로 한참을 불리우다, 1992년에서야 비로소 여러 시민과 단체들의 청원에 의해 ‘탑골공원’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그 공간은 외로운 노년층이 동년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소외된 노인문제 등을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공간으로 인식되며,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어쩔 수 없이 갖고 바라보는 공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탑골공원은 우리 역사상 단순한 공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곳이다. 잘 알고 있듯이, 탑골공원은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 등이 있으며,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이다. 이에 더해,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인데, 탑골공원이 서울에서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야외공연장의 역할을 일찌감치 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이제 곧, 꼭 100년 전의 기록이 될, 1920년 9월 동아일보의 기사를 살펴본다. 


塔洞公園(탑동공원納凉演奏會(납량연주회)는 오날이 마즈막

본사후원으로 京城樂隊(경성악대출연의탑골공원안 納凉演奏會(납량연주회)는 여름동안 매주일목요일이면 이를흥행하야 서놀한여름밤 푸른숩속에서 료량이 이러나든음악소래는 긴여름날더움과 괴로운부닷김에 피곤한 경성시미닝게만흔위안을 주엇스나 그와가치여러시민에게 위안을주던 납량연주회는 오늘로써 끗을막을터이라 명년이다시되면 다시긔회를어더 연주할는지 모르겟스나하여간금년 여름으로는 오늘이마지막이 될듯하더라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 탑골공원에서는 여름 더위를 피해 시민들이 산책을 나와 같이 즐길 수 있는 음악공연이 진행되었다. 당시 ‘경성악대’는 1901년 독일인 예케르트가 이끌었던 대한제국의 군악대에 뿌리를 두었던 악단으로, 일제침략 이후인 1915년에 군악대가 완전히 해체되고, 이후 같이 활동했던 군악대원 20명이 다시금 민간악단으로 재조직해 활동했다. 자금난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유추해 보건데, 당시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서양의 음악을 우리에게 소개한 시초라는 가치와 역사성에 대해 많은 이해를 얻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一張(일장)의 入場券(입장권)도 貴重(귀중)한 同情(동정)

우리동반도에 새예슐이 첫소리를 치기는 이십년젼 탑골공원랍석탑의 올흔편에서 군악대의나팔에 첫김을너은때이라 실로조선의군악대는 서양의 음악을우리의게 소개한시초이오 이래금일까지

빈약한 우리음악 사회의대표자이얏슬뿐아니라예슐가의텬품이 풍부한우리네의아뢰이는 음악은실로동양에 잇는음악대중에 뎨일이라는 명예잇는비평을 어덧도다실로이음악대는우리예단의광성이오우리의현재에가진예슐중에 뎨일큰사랑 거리의하나이라 우리는음악에 취미가잇고업슴을 불계하고 이음악대를 사랑하얏스며이음악대가 잇슴을 자랑하지아니아얏는가  (후략)

 동아일보 1920.6.8. 기사 중.

탑골공원 전경 (사진출처:서울시정보소통광장)

     19세기 말, 탄생한 도심 속 공원이었던 탑골공원은 이후 우리에게 소중한 역사적 공간이었으며 정서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갖게 된 공간이었다. ‘긴 여름날의 더위’를 피해 거닐 수도, ‘괴로운 부대낌’에 피곤한 당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1920년대 신문을 보면 탑골공원의 사계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계절이 바뀌는 때 마다 탑골공원을 배경으로 한 꽃나무 사진이며, 사람들의 사진 등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음악이 함께 했던 공간으로도 그 의의를 찾아보고 나니, 오늘날 ‘온라인 탑골공원’의 탄생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단지 새로운 세대에 밀려 ‘나이 듦’에 대한 자각으로 스스로를 ‘어르신’ 취급하며 붙인 이름 치고는, 본래 ‘탑골공원’ 이 가진 역사성에 비춰볼 때, 그 우연성과 필연성이 놀라워 무릎을 한판 세게 칠 노릇이다. 우리에게 정신적인 재산을 안겨준 공원이기도 한 ‘탑골공원’의 가치를 100년의 시간이 지나 우연히, 그야말로 의도했던 바와는 달라도, 온라인 공간에서도 발견하게 된 듯 반가워서 말이다. 

     또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렇게 ‘탑골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탑골공원’에 모이게 된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도 모른 채, ‘요즘 것들은 말이야’로 자신보다 어린 세대와 구분 짓고 스스로 벽을 치기 쉬운 나이대로 접어들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세대를 구분 하는데 있어 주효한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춘기 시절의 동일한 경험치라 말한다. 이를 통해 해석해보자면, ‘온라인 탑골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은 여전히 본인들보다 젊은 세대와 묶어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비록 나이 대는 다를지라도 예민한 감각을 가진 시절, 동일하진 않겠으나 비슷한 음악적 경험을 한 첫 세대들이기에, 대중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광범위하게 같은 세대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 아직, 어린 세대들과 벽을 치고 스스로를 가두기보다는 더 열정적으로 젊게 놀아보길 바란다. 아직 그대들은 ‘나 때는 말이야’를 외치며 기성세대의 안 좋은 것들을 답습하기에는 너무도 젊고 매력적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 저때로 돌아가고 싶 ㅠ ㅋㅋ” 이라는 채팅창의 글을 보고, 그 마음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지난날을 돌아보기에는 아직은 그대도, 나도 갈 길이 창창하다는 말을 던지고 싶어, 길게 에둘러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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