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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Feb 07. 2019

주름의 아름다움

삶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얼마 전 친구의 결혼식에서 신랑의 눈가 주름을 보았다. 예전 같으면 내가 제일 싫어했을 법한 주름이었다. 그냥 세월이 지난 흔적만이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날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이 웃고 있는 그의 눈가에 깊게 파여있는 주름을 보며 나까지 행복감을 느꼈다. 10년을 넘게 알아온 나의 친구 앞에 펼쳐진 삶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도 나이를 들어가며 하나둘씩 주름이 생겨간다. 내가 관리에 소홀한 탓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세월과 수분의 결핍, 그리고 중력 탓이리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하고 있다. 그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에 새겨지는 그 무언가라고 되뇌며 넘아가곤 한다. 그렇지만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람이 늙고 병드는 것을 혐오하던 시절이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장난 삼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곤 했다. 며칠 밤만 더 자면 어른이 되겠네, 하는 식의 흔하디 흔한 부모 자식 간의 대화였다. 그렇지만 다소 흔하지 않은 성격의 나는 어른이 되기 싫다면서 툴툴댔던 기억이 난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싫었던 것일까. 


어릴 적에는 늙고 병들어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 생각이 극대화됐던 것은 아마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의 유년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허망하게 한 줌 재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도 크고 오래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존재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산화하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혐오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할 때에는 요절하는 천재를 꿈꾸기도 했다. 물론 나는 범인인지라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서른 언저리에서 불꽃같이 모든 것을 세상에 불사르며 화려하게 피고 지는 모습을 부러워했다. 국내에서 보자면 이상, 해외에서 보자면 모차르트 같은 그런 느낌의 사람들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재능이 없었다고 탓하기에는 그들에 비해 게을렀고 부러움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다르게 늙어갔다.




노화를 혐오하던 시절에서 어느덧 20년가량이 흘러 나도 30대가 되었다. 되기 전에는 겁도 나고 했지만, 막상 되어보니 별 것이 없다. 또 다른 하루가 펼쳐지고,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버텨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세상을 살다 보니 요즘에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노화란 한 사람이 걸어온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 그 요지이다.


마흔이 넘으면
사람은 본인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엘레노어 루즈벨트의 말처럼 작품이 되어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것도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주름이 생기면 어떻고, 검버섯이나 새치가 생기면 어떠한가. 다 시간이 준 훈장 같은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에게 참 많은 일이 생기곤 한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위기를 인간에게 준다고 하지만, 어떤 때에는 우리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절망이 닥치고는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 위기를 해쳐나가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정면 돌파하는 것과 피하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전자의 경우 살아가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전자를 택해서 본인의 책임을 놓지 않고 버텨나간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노화일 수 있다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냥 안 좋게만 볼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주름 따위로 그려지는 노화는 삶이라는 고(苦)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고 나니 무작정 노화를 피하고자 성형외과나 피부과만 전전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더 나이가 들어 거울을 볼 때 부끄럽지 않은 증표들이 남을 수 있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반성해본다. 과거의 내가 노화를 혐오했던 이유가 일종의 변명이 아니었는지, 하고 말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것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책임감을 피하고자 하는 어리광이 아니었는지, 이 글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반추해본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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