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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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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r 17. 2020

이탈리아에서 마신 커피

Cafe Marocchino





지난 12월 엄마와 함께 10박 11일의 서유럽 패키지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이 처음인 엄마와 열흘 내내 함께 지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이탈리아였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미국과 유럽까지 위험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뉴스에 얼마 전에 갔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 사람들로 가득했던 연말의 왁자지껄함은 해가 바뀌고는 위험천만한 불안감으로 뒤덮였지만 그때 마신 커피를 떠올리면서 다시 모든 상황이 좋아지길 바라본다.


에스프레소의 나라답게 우린 자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커피를 마시러 다녔다. 처음 커피를 마신 장소는 휴게소였는데 워낙 차를 타는 시간이 길어서 휴게소조차 관광 포인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커피 향이 나는 곳으로 가니 바리스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커피바가 있었다. 의자가 없어서 서서 마시거나 테이크 아웃을 위해 최적화된 장소였다. 그 자리에서 1.30유로짜리 에스프레소 두 잔을 주문했다. 라바짜 커피머신에서 갓 뽑은 두 잔이 서브되었다. 에스프레소가 처음인 엄마에게 첫 한 두 모금은 그냥 드셔 보라고 한 후 마지막에 설탕을 넣어 드렸다. 그렇게 마시면 달콤 쌉싸래한 느낌으로 마무리될 것 같아서였다. 양도 적고, 너무 쓰지 않을까 걱정하던 엄마는 나보다 빨리 커피를 넘기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와, 이게 에스프레소구나”


이탈리아에서의 첫 커피는 그랬다. 엄마는 그동안 에스프레소를 우습게 본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 또한 이탈리아가 처음이라 이곳의 커피는 어떨지 기대가 컸다. 잘 차려입은 바리스타가 있는, 분위기 좋은 커피 바를 상상했지만 첫 커피가 휴게소라서 실망한 것도 아니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크레마가 부드럽고 진한 에스프레소 맛도 맛이거니와, 오로지 커피를 마시겠다는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 틈에서 짧고 굵게 행복했다. 회전율이 빨라 그만큼 신선한 원두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피렌체에 간 건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르네상스 시대를 기억하는 붉은 벽돌과 파스텔톤의 대리석을 사용한 건축물 사이를 걷고, 두오모 대성당과 조토의 종탑을 바라봤다. 유명한 축제인 베네치아 카니발의 영향인지 거리 곳곳에는 가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나라답게 조각상 석고 소품을 파는 가게도 보였다. 그 외에도 젤라토 아이스크림과 가죽 등 이탈리아의 오랜 문화적 색채가 느껴지는 가게와 현대적인 것들이 섞여 걷는 이를 즐겁게 했다.


패키지여행 팀과 함께 가이드를 따라다니다가 운 좋게 2시간가량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린 기다렸다는 듯 커피숍을 찾았다. 두오모 대성당 정문을 지나니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는 광장이 보였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낮 시간이었다. 성당 후문 쪽에는 거리의 화가들이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고 그 앞으로는 볕을 받은 카페테라스가 여럿 있었다. 두오모 성당과 거리의 화가, 대형 트리 사이를 지나는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서는 앉을 수 없는 자리에 앉아 메뉴를 살폈다. 엄마는 카페 라테를, 나는 생소한 이름의 카페 마로끼노를 주문해 보았다.


마로끼노 혹은 마로치노라고도 부르는 이 커피는 1930년대 이탈리아 북서쪽 피에몬테 지역(Piedmont)에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어로 마로끼노(marocchino)를 찾아보면 뜻이 모로코(moroco)라고 나온다. 커피 이름에 웬 모로코인지 의아했는데 이유는 색깔에 있었다. 30년대 당시 모로코산 염소 가죽으로 생산한 헤어밴드의 색이 우유와 에스프레소의 색이 섞인 라이트 브라운 색과 닮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같은 커피라도 나라마다 조금씩 첨가하는 내용물이 다르고 이름의 유래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재미있다.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지역에서는 마로끼노에 뜨거운 코코아를 넣어 마신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위키 백과 참조)


커피의 이름은 커피가 입은 또 다른 옷처럼 느껴진다. 옷이 날개라고 하듯 커피에 붙은 이름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반 라테 잔이 아닌 60~80ml 정도의 데미타세 유리잔에 커피가 나왔다. 에스프레소 샷 위로 스팀 우유가 섞여 있고, 표면의 거친 우유 거품에 코코아 가루가 덮여 있었다. 코코아 가루가 조금씩 까매지는 모습을 보며 한 모금 마셔보았다. 에스프레소 맛이 더 강한 우유를 넘기자마자 생 코코아 가루가 묵직하게 맴돌았다. 텁텁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첫인상이었다.   


평소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는 엄마는 라테를 마셔보더니 (역시) 맛있다고 했다. 여행지에 가면 안 해 보던 걸 하게 되는데 카페에서도 그렇다. 평소라면 무심하게 주문할 것을 메뉴판을 정독하고 이 말은 무슨 말인지 따지며 맛을 상상한다. 설령 아는 맛을 주문해도 낯선 장소에서 마시는 커피는 새롭다. 그래서인지 일반 라테일 뿐인데도 마시는 장소, 함께 있는 사람, 날씨 등이 맛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엄마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셔보는 것이 로망이었는데 소원을 이루었다고, 믿기지 않는다며 주위를 여러 번 둘러보면서 웃었다. 두 시간의 자유시간 중 1시간을 커피숍에서만 보냈다. 많은 곳을 돌아볼 수도 있었지만 아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커피를 기다리던 시간도 여행의 순간으로 기억되니 말이다. 지금은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의 커피를 마시고 있지만 가끔 그곳이 떠오른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봄은 다시 찾아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생장하고 있다. 자연의 복원력, 본능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곧 겨울 같지 않은 봄이 여기저기에 스며들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요즘이다. 언젠가 다시 이탈리아에 가게 된다면 또 재밌는 커피 시간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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