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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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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pr 15. 2019

 커피의 시간

서산 <기록>



서산에 있는 작은 카페에 갔다. 캠핑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커피 한 잔 할까?”

마음이 맞아서 가능했던 일이다. 남편이 검색해 둔 카페가 있다면서 차를 돌렸다. 유리창을 하얀 커튼으로 가린 카페 입구에 도착했다. <기록>이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원목으로 된 넓은 테이블과 앤티크한 그릇장이 보였고, 카페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엔 시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책마다 색이 다른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이었다. 붉은빛의 양탄자가 깔려 있고 듬성듬성 놓인 원목 의자와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커피를 주문하는데 메뉴가 적힌 곳 옆으로 쪽지처럼 붙은 안내 사항이 눈에 띄었다. 연필로 힘을 주어 쓴 글씨에는 조용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카페 주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커피를 고르는 사이 공간에 대한 무언의 약속이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SNS를 보면 가 보고 싶은 커피숍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방문하기도 전에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다. 복사하기와 붙여 넣기를 반복한 것 같은 장소와 메뉴도 그렇다. 이미지로 소비하는 카페가 아닌 내가 정말 가고 싶은 카페는 어떤 곳인가 생각해보니 참 별 것 없었다. 커피를 빨리 주지 않는 곳, 음악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은 조용한 곳.   


커피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이 꼭 마셔보라고 했던 게이샤 커피가 오늘의 메뉴에 있었다. 커피 품종의 일종인 게이샤는 에티오피아에서 재배되는데 맛과 향이 풍부하다고 한다. 반가운 마음에 주문을 하고 카페를 구경했다.




벽 한쪽에 가득 붙여 둔 종이들이 눈에 띄었다. 문인들의 소설이나 시를 적은 필사였다. 주인의 글씨 같기도 하고 이곳에 왔던 다른 사람이 쓴 글씨인 것도 같았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누군가가 필사한 백석의 시를 읽었다. 책상이 바로 앞에 있어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문장을 기록하기에 좋아 보였다.     


주인은 책을 좋아하나 보다. 특히 시집이 가득한 걸 보면 시를 더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일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나른한 오후. 나도 그 시간을 천천히 즐기고 싶어서 시집 한 권을 골랐다.

이성복 시인의 <아, 입이 없는 것들>   




구석진 자리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비숑 강아지가 주인 품에 안겨 있었는데 마치 둘이 함께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아지와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했는데 갑자기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남편은 내가 뽀글뽀글한 털옷을 입고 있어서 경계하는 거라고 했다. (하하)




커다란 얼음이 든 게이샤 커피를 마셨다. 기분 좋은 신맛과 함께 달콤한 향이 났다. 낮게 흐르는 음악, 책과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만드는 분위기가 공간의 밀도를 채우고 있었다. 시집을 뒤적이며 마시는 커피란! 여행의 마무리는 우연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카페 주인의 차분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원두를 분쇄하고 커피를 내리는 모습에서 자신의 일을 대하는 진중함이 느껴졌다. 많은 카페를 다녀보니 주인이 서두르지 않는 커피는 웬만하면 다 맛있더라. 맛은 사람의 일에서도 반영이 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여유를 부린 커피 시간이었다. 글과 서툰 그림으로 기억하고 싶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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