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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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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pr 27. 2020

밤의 목련과 커피




수시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카페에 간 지도 꽤 된 것 같다. 친구와 만나 아무렇지 않게 마시던 커피 시간도 줄어들었다. 평범하던 걸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커피 생활을 한다.


어떤 날은 밤에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오전과 이른 오후에 걸쳐 두 번 커피를 마시는데 오후 커피를 놓친 날이었다.







한밤중에 원두, 핸드밀, 드리퍼, 컵, 여과지, 주전자를 꺼냈다. 스타벅스에서 산 봄 한정 원두가 딱 한 잔 분량으로 남아있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이미 여름 한정 원두가 나왔다) 빨리 마셔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캡슐 커피에 밀려서 남은 원두였다.


드르륵드르륵. 도심에 살지만 밤이 되면 온갖 소음이 낮게 깔린다. 그런 탓인지 분쇄를 하는데 아침에 원두를 갈 때와는 다른 묵직한 소리가 났다. 칼리타의 수동 핸드밀을 오래 사용해서 기계를 살 계획이 있지만 여전히 손으로 갈 때 느낌이 좋다. 커피숍에서 원두를 갈아준다고 해도 그냥 가져오는 게 좋은 이유이다. 원두를 다 분쇄하면 빨리 소비해야 하는 문제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원두는 빨리 소비할수록 본연의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 자기만의 속도대로 천천히 마시는 사람이라면 원두를 포장된 그대로 집으로 가져오는 게 낫다.





원두를 분쇄하기 전, 물을 담은 전기 포트를 켰다. 서버 대신 좋아하는 머그컵 위에 드리퍼를 두고, 여과지를 접어 끼웠다. 분쇄된 원두를 탈탈 털어 넣고 나니 물이 다 끓었다. 한 잔만 담을 거라 주둥이가 긴 드립 전용 포트 대신 그냥 전기 포트로 대신했다. 늦은 밤에 설거지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서.



아무튼 커피가 이겼다. 밤에 커피를 마셔도 잠자는 데 지장을 받지 않는 걸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집에는 늘 디카페인 캡슐 커피가 있지만 향미 깊은 핸드드립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외출을 하지 않은 주말이라 뭔가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꽃구경도, 일상적 만남도, 봄도 저만치 멀어진 것 같지만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커피이니 말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마스크 없이 카페에 머물렀다. 책을 읽으며 먼저 다 마신 커피를 두고 다른 커피를 주문해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친구와 수다를 떨던 시간도 있었다. 얼마 전에 종로에 갔다가 잠깐 들른 카페에서는 플랫화이트를 5분 만에 마시고 나오기도 했다.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그윽한 멋이 있으니 곧 좋은 때가 오면 마음껏 커피 시간을 누리고 싶다.



현실은 어제 입은 잠옷 그대로 맞이한 일요일. 주말이라 더 외출을 자제했던지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후에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목련이 하얗게 만개한 걸 봤다. 아파트 화단의 그늘진 곳에 있는 우리 동네 목련은 여느 목련처럼 일찍 봉오리를 맺지만 꽃이 늦게 핀다. 3월과 4월엔 일부러 계단을 올라가며 이층, 삼층, 사층에 걸쳐 보이는 목련을 관찰한다. 이럴 땐 복도식 아파트인 것이 좋다. 요즘처럼 무조건 마스크를 끼고 외출을 할 때 숨을 크게 쉬어도 공기가 들어올 틈이 없으니 잠깐 문을 열고 아파트 바깥공기를 쐴 수도 있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려다가 컵을 들고 목련 나무가 정면으로 보이는 이 층으로 내려갔다. 입고 있던 잠옷에 겉옷만 두르고 커피를 조심조심 들고나갔다. 다음 날은 월요일인지라 아파트는 여느 때보다 더 조용했다. 아무도 없기에 다행이었다. 밤에 바라보는 목련은 도심의 또 다른 불빛 같았다. 드문드문 불 켜진 아파트의 빛과 가로등 불빛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요즘에는 미세먼지가 별로 없는지 맑은 하늘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별이 빛나는 게 보였다. ‘공기가 이렇게 시원하고 달콤한 거였나’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늦은 밤과 목련. 그리고 손에 든 커피. 카페에서 마음껏 커피 시간을 보낼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은 또 다른 시간을 선물한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사소한 풍경 같은 것 말이다. 집 밖을 벗어나지 않고도 커피를 마신 시간. 조금은 특별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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