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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r 02. 2020

재난, 일상의 회복



평범하던 일상이 멀게 느껴진다. 이름도 낯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지금 일하는 학원은 휴원을 결정했고 한 달 넘게 속보 특보 확진 재난 감염 등과 같은 말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로 계속 유지되어 온 교회 집회도 237년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하니 초유의 사건이다. 원인도 불명확하고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는 공포를 조장한다. 포비아(PHOBIA)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불안을 느끼고 공포를 갖는 심리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오픈 사전을 보니 이 단어는 상황에 따라 합성어가 생겨난다. 미세 먼지에 대한 불안을 더스트 포비아(dustphobia)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지금 대한민국은 바이러스가 아닌 포비아에 감염돼 있다. 확진자 숫자가 늘고 사망자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움츠러든다.      


얼마 전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옆 동네에 사시는 할머니가 집에 들어가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온 동네가 뒤집힌 거다. 곧장 현관 밖을 나가 보았다.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이 도착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연관성 여부로 할머니를 부축한 경비원도 격리가 되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경비실에 간다거나 택배물을 찾는 일을 잠시 멈추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빗줄기가 굵어진 오후, 대낮의 고요는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소리 없이 깨진 유리의 흔적처럼 닿지 않는 공포가 아파트까지 엄습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아픈 할머니가 걱정이었다. 서 너 시간 뒤에 바이러스와 관련이 없다는 방송이 나왔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야 했다.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좋은 기분은 잠시, 여행은 고사하고 외출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그냥 불안한 시간만 번 기분이었다.



혹시 오랫동안 외출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온라인에서 물과 햇반, 냉동식품 등을 사 두었다. 평소 아침에 주문하면 당일 배송받을 수 있던 것도 이틀이나 삼일 뒤에나 가능했다. 문제는 마스크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는데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약국이나 마트에서 마스크 몇 장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기사거리가 되고 있다.

2011년에 개봉된 영화 <컨테이젼 contagion>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번 사태와 닮은 구석이 많다. 원인 불명의 신종 바이러스로 사람이 격리, 감염되고 급기야 사망에 이르는 상황 속에서 가짜 뉴스가 횡행하고 사람들이 피폐해지는 과정이 담겨있다. 셰프가 주방에서 손을 대충 닦고 베스(기네스팰트로)와 악수하는 장면 후 플래시 백을 통해 보여 준 모습은 그야말로 소름이었다. 인간이 산을 밀어내자 살 곳을 잃은 박쥐가 돼지 축사에 들어오고, 그들이 먹던 먹이나 배설물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돼지가 도축되어 주방 어딘가에서 요리된다. 영화는 신종 바이러스의 전말을 시사한 것이다. 지금껏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생기고 변종의 형태를 보이는 건 결국 인간의 이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003년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와 2015년 중동 지역에서 시작된 메르스에 이어 2019년 우한발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세상은 날이 갈수록 효율적이고 세련되고 과학적으로 변화하지만 바이러스가 생길 때마다 속수무책이다. 개발과 이익을 좇는 사이 깨끗한 공기도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는데 이제는 바이러스까지 발목을 잡는다. 그동안 인류가 등한시한 환경이 역습을 시작한 것이다.                

이틀 만에 집을 탈출했다. 평생 딱 두 번 외에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는 철학자 칸트도 동시대를 살았더라면 산책을 멈췄을 일이지만 탄천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걷고 자전거를 타고 운동기구에 모여 운동을 하고 있었다. 재택근무를 하거나 나처럼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이 집에 갇힌 고통을 참지 못해 나온 듯했다. 연일 미세먼지가 좋은 요즘에도 다른 이유로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게 안타깝지만 말이다. 불어난 공포와 달리 평온한 오후였다. 메마른 땅엔 초록빛이 돌고, 푸르스름한 봄까치꽃과 작게 솟은 개나리가 보였다. 청둥오리와 두루미는 볕이 스민 물 위를 우아하게 노닐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툼한 패딩을 입었는데 반팔을 입고 뛰는 사람도 있었고, 분홍이나 노란색의 겉옷을 입은 어르신도 보였다. 나만 온통 검은색이라 계절에 뒤떨어진 기분이었다. 불안에 잠식된 사이 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들 불안하면서도 불안에 사로 잡히지 않기 위해 여느 때보다 평범한 일상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마스크 사이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사람들 틈을 걸었다.   

그리운 것들의 목록이 늘어난다.


늘 걷던 길, 책을 읽으러 가던 커피숍, 동네 도서관, 아무 때나 가서 사기만 하면 되던 식료품, 보고 싶을 때마다 만난 사람들, 사소한 약속, 북적이는 거리와 밤공기.


이렇게 늘 옆에 있어서 당연했던 것들이 크게 느껴진다. 일상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게 온전히 나의 의지와 힘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며 살았는데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재난과 바이러스 앞에서 우린 무력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나약하지는 않다. 불안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힘을 쓰고 있다. #힘내자대구, #힘내라경북과 같은 해시태그에 모인 마음은 허상이 아니다. 질긴 고통을 겪은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유연함이 자리할 것이다. 일상은 부재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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