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련시킨 지나간 애인들
‘하지만’이 빠진 답장은 흥미로웠다. 원고 투고를 보낸 뒤 출판사로부터 받는 답장에 '하지만'이 있으면 확실한 거절이다. '원고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옥고를 꼼꼼하게 잘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원고의 검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편집부에서 논의한 결과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응용되어 날아왔다. 마침내 가슴을 후벼 파는 '하지만'이 빠져있는 장문의 편지를 받아냈다. 그것도 총 3번이나. 하나같이 따뜻한 사랑이 가득 담긴 진심 어린 연애편지와 같았다. 마음 깊이 담아둔 소중한 사연을 수줍게 공개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 선생님! 시작이 좋은데요?) 그러잖아도 전업주부인 아빠의 육아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공감하는 부분들이 좀 있네요. (네! 맞아요. 그게 접니다. 저!)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원고매수도 부족합니다. 주제와 벗어나 있는 원고를 정리하면 양적인 부분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네?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글이 별로일 수는 있어도 주제나 핵심을 벗어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혹시 그렇더라도 부족한 양은 더 쓰면 되잖아요.) 읽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주거나 공감할 수 있는, 저자만의 노하우를 보여주는 부분이 많이 보강되었으면 합니다. 글의 경쟁력을 살리고 이미 출간된 책들과도 차별화도 필요합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좋은 얘기임은 틀림없는데요. 그럼 지금 제 글이 이렇지 않다는 건...) 개인적인 결론은 안타깝게도 지금의 원고 상태로서는 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보완되고 해결되면 출간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요? 그런 방향으로 함께 수정 보완해서 해보자는 게 아니고요?)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분이라 욕심을 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서 도대체 왜...)
아쉽게도 내 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하게 '즐겁고 유익한 아빠 육아합시다!'가 아니다. 틀에 박힌 남과 여에 대한 시각과 사회 인식이 잘못 고정되어 있다는 점을 짚고 있다. 골치 아픈 근본 원인은 제쳐둔 채 맛있어 보이고 눈에 띄는 것만 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책은 굳이 나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이미 많이 나와 있으니. 같이 작업을 시작했더라도 어디선가 꼭 부딪히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차이고 분해서 하는 이야기 아니냐고? 그래 맞다.
보통 투고에 대한 회신은 바로 드리는 편인데, 이 원고의 경우 조금 많이 고민을 했거든요. (드디어 제게도!) 주제 의식과 마인드 등이 굉장히 맘에 들긴 하는데, 사실 아빠 육아라는 소재에 대해서는 이미 한 차례 유행처럼 서점가를 지나친 바가 있거든요. (전 아직 그 유행을 타보지도 못했는데 언제 저만 빼고 지나쳤나요.) 물론 원고 내에서 얘기하시는 구체적인 내면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기존과는 다른 책으로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다가, 아쉽고 송구스럽게도 반려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도저히 살려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셨군요.) 아빠 육아라는 관념에 대해서 한 번에 어필이 되는 그런 주제 의식이 좀 더 강하게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여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잘 아시는 당신이 함께 도와주실 순 없을까요?) 글도 너무 잘 쓰시고 정말 좋은 아빠, 좋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는 생각에 존경심도 듭니다. 진짜 더 탄탄해진 책으로 꼭 서점에서 마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아... 칭찬과 함께 님은 갔습니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았다. 쓴 이야기가 곡해되지 않았다. 나눠준 고민은 의미가 있었다. 아쉬운 부분을 이끌어 줄 출판사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진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은 저자와 원고를 만나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내가 출판사 대표라도 나 같은 코흘리개 데려다 먹이고 키우는 것보다는 제 몫 하는 장성한 친구와 함께하고 싶으니.
감히 선생님의 귀한 원고를 평가하기도 어렵거니와 좋은 마케팅으로 세상에 널리 알리기에도 아직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헷갈려요. 저 이미 평가된 거 맞죠?)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펴내시는 만큼 인지도 있고 마케팅 파워가 있는 출판사와 컨택하시는 게 선생님과 출판사 모두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제가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들이 저를 피하는데 어쩌죠?) 투고 거절 메일이 저자로서 자존심상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또 당연히 지나쳐야 할 과정일 것 같습니다. 이왕 마음먹었으면 잦은 거절에 상심하지 마시고 더 투고를 해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운명처럼 나타나는 출판사가 있을 겁니다.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해주시는 말씀이시네요. 고마워요.) 1년에 8만 종가량의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 무수한 책들도 모두 저마다 의미를 가지고 있겠지요. 냉정한 시장에서 선택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자본력이 있는 쪽이 낫습니다. (차가운 현실이 숨어있군요. 주신 말씀이 이해되네요.) 가끔은 매크로 투고에 지칠 때도 있어요. 출판사가 출간한 책 중 자신이 재미있게 본 책에 대해 한두 마디라도 언급하고 투고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 출판사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고 복붙 한 메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답변이 오지 않으면 출판사 탓을 하더라고요. (그게 접니다. 죄송해요. 제대로 찔렸어요.) 퍼스널 브랜딩도 계속해서 해보십시오. 페이스북, 인스타 몇만 수준으로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면 육아에 관심 없는 출판사라도 앞다투어 연락해 올 겁니다. (더 이상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징징대지 않고 알리기 위해 뭐라도 계속하겠어요.)
편지가 뜨거웠다. 어리숙한 초보 작가 지망생에게 세상을 알려주면서도 용기를 심어주고 싶어 했다. 읽고 또 읽었다. 솔직한 가르침을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거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받아먹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소화하려고 열심히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연애편지를 감상한 소감은 어떠한가. 오래되고 식상한 주제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지. ‘사랑하지만 헤어졌다.’ 사랑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앞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야기. 대답을 오래 기다렸던 상대는 가슴이 찢어진다. 지난 시절 내가 보냈던 비슷한 연애편지들이 이제야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거라면 과한 억지일까. 진한 거절로 상처 입고 쓰라린 마음은 꽤 오래갔다. 정말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이라는 착각을 만들기도 했다. 사랑할만하지 않기 때문에 버려진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어디에도 ‘하지만’은 없었지만 ‘하자고’도 없었다.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이제 화딱지 나서 꼴도 보기 싫고, 더 할 힘도 없으니 그만두어야 할까. 다행히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기로 한 것은 끝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하는 데 진심이다. 스스로 미친놈 같을 때가 있을 정도로 꾸준히 한다. 슬픈 연애편지에 담겨 있던 귀한 이야기를 적용해서 계속 투고했다. 투고 메일에 출판사에 대한 생각을 적었고, 읽은 펴낸 책이 있다면 감상도 남겼다. 시간 낭비라는 핑계로 귀찮아하던 인스타그램도 시작했다. 꾸준히 글을 올리면서 팔로워는 늘어났다. 헤어진 연인들과의 경험이 더해지자 내가 보내는 연애편지는 점점 더 고혹해져 갔다. 처절한 기억을 승화시킨 덕분에 매력이 짙어져 갔다.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출판사에서 답장이 더 많이 오고 내용의 질이 달라졌다. 시원하게 ‘같이 책 내봅시다!’라는 대답은 아직이었지만, 분명히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출판사는 한 번도 날 '작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지난 연애편지에서조차 전 애인은 '선생님' 호칭을 고수했다. 따뜻한 온기에도 불구하고 칼같이 정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 말 만큼은 절대 새어 나오면 안 된다는 듯이. 여전히 선생님으로 불리는 익숙한 날이 쌓여가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나를 작가로 부르는 곳이 나타났다. '작가님'. 처음으로 어색하게 불린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